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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Dec 08. 2020

범람하는 미술책 더미에서 찾은 진주

나카노 교코 《욕망의 명화》 + 양정무 《난처한 미술이야기 5》

《무서운 그림》 시리즈로 국내 독자들에게 친숙한 일본의 미술책 저자 나카노 교코의 신작 《욕망의 명화》(북라이프, 2020)를 읽었습니다. 일본 월간 잡지 <분게이슌주>, 즉 <문예춘추>에 연재한 글 가운데 스물여섯 꼭지를 뽑아 제목을 바꾸고 내용을 더해 묶은 책입니다. 비교적 얇은 분량에 읽기도 꽤 수월하죠.     


미술과 심리 치유를 버무린 책이 하루가 멀다고 쏟아져 나오는 시대입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대체로 이런 부류의 책들은 뚜렷한 한계를 보여줍니다. 첫째, 그림 자체에 충실하지 않습니다. 그림을 액세서리로 취급하는 겁니다. 깊이가 없을 수밖에 없으니, 내용도 자연 부실합니다. 둘째, 미술 작품에서 무슨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떠벌립니다. 심지어 자기 생활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는 저자들도 많더군요. 독자를 위한 것인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셋째, 다른 분야에 무지합니다. 서양화를 이야기하는 책에는 한국화(동양화) 이야기가 없고, 심지어 한국화(동양화)를 이야기하는 책은 더더군다나 찾기가 어렵습니다. 문화적 사대주의라고 볼 수밖에 없죠. 우리 저자들이 우리 그림을 감상하고, 분석하고, 소개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그런 일을 대신에 해준다는 말인지. 그런데도 이런 책들이 꾸준히 나오는 걸 보면, 찾아 읽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겠죠. 씁쓸합니다. 그림이 부속품 취급을 받고, 우리 그림이 홀대받는 현실이 말이죠.     


그런 점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은 나카노 교코의 책은 실은 전혀 가볍지 않습니다. 예컨대, 존 에버렛 밀레이의 그림 <오필리아>는 너무나도 유명한 그림이어서, 서양 미술을 다룬 수많은 책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카노 교코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이 그림에 접근하는 ‘자기만의 시각’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전혀 눈여겨보지 않을 것 같은, 그림의 왼쪽 귀퉁이에 작게 그려진 새 한 마리. 이 대목을 서두로 제시하면서 그림을 향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거죠. 아직 읽지 않은 분들에겐 죄송합니다만, 이 머리말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유럽 울새는 일본 울새와 달리 가슴이 빨간 게 특징이다십자가에 매달린 예술의 이마에 박힌 가시를 빼내려다 피가 묻어 그렇다고 한다또 이 새는 숲을 헤매다 죽은 아이들의 시체에 나뭇잎과 꽃잎을 덮어 추모한다고 알려졌다그리고 정신을 잃은 오필리아(Ophelia)는 울새와 자신의 생명을 동일시하는 노래를 읊조렸다……화가는 무심하지만 치밀한 계산 아래죽음과 관련 깊은 이 새를 그려 넣어 보는 사람의 무의식에 호소하고 있다.     


이걸 읽고 나서 책장을 넘기면 본격적인 그림 이야기가 나오죠. 저자가 그림의 내용이나 그림에 얽힌 내력을 충분히 공부한 뒤에 자기 방식으로 소화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건 단순히 글의 분량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본인인 저자는 자기 문화에 대한 단단한 자부심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자국의 옛 풍습과 전통, 자국 문화와 예술이 낳은 위대한 유산을 그림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죠. 참 부러웠습니다. 왜 우리에겐 이런 저자가 없는가. 왜 우리 저자들은 주체적으로 남의 미술을 소화하지 못하는가.     


(제가 모든 미술책을 읽은 것은 아니므로 감히 단정해서 말하긴 어렵습니다. 이걸 염두하고 이 글을 쓴다는 점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누구보다도 미술책을 많이 읽는 독자의 관점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던 차에 마침 읽고 있던 양정무 교수의 뛰어난 미술 입문서 《난처한 미술이야기 5》에서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았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소개한 이 책의 중간에 14세기 전반에 암브로조 로렌체티라는 화가가 그린 <좋은 정부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그림이 등장합니다.     



폭이 자그마치 14m나 되는 이 파노라마 같은 프레스코 벽화에는 그 시대를 산 중세인들이 이상적으로 여긴 도시의 풍요와 행복이 가득 담겨 있죠. 한 번 상상해 봅시다. 제목에서 보듯 <좋은 정부가 다스리는 나라>는 과연 어떤 나라일까. 그러다가 저는 불현듯 우리 옛 그림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그려진 것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책장을 넘기는데 거짓말처럼 그 그림이 언급돼 있었죠.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태평성시도>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 역시 실제로 존재했던 도시를 그린 게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했음 직한 도시의 풍경을 상상으로 그려낸 겁니다. 양정무 교수는 이 그림을 나란히 소개하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구절은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도 모르겠지만 태평성시도가 그려진 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연구자들도 있습니다태평성시도는 대략 18세기바로 조선 영정조 때 그려졌어요이 시기에 조선의 문화가 다시 융성하게 되었다고 보고 르네상스라고 부르는 거죠어쩌면 르네상스라는 이름으로 두 시대를 연결 지을 때 로렌체티의 그림과 태평성시도는 좋은 연결점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우리 저자들의 미술책에서 이런 글쓰기를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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