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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Apr 23. 2023

언어의 기원에 관한 설득력 있는 통찰

모텐 H 크리스티안센, 닉 채터 <진화하는 언어>(웨일북, 2023)

1     

지난해 말 어느 미술관 기자간담회 자리.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해 내한이 무산된 대신 자기 나라에서, 그것도 한국 시각에 맞춰 새벽에 화상 간담회에 모습을 드러낸 작가의 고국은 헝가리. 당연하게도(!) 간담회는 헝가리 말로 진행됐고, 한국말을 잘하는 헝가리 문화원 직원이 통역해주긴 했지만, 나중에 작가의 헝가리 말을 다시 들으면서 발언을 어디부터 어디까지 끊어서 써야 할지 몰라 잠시 망연자실. 다행히 그날 바로 뉴스를 제작하는 건 아니어서 며칠 시간을 벌었고, 간담회 때 통역한 바로 그 헝가리문화원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내 도움을 청했고, 천만다행으로 어디부터 어디까지 발언을 사용하면 되는지, 그 발언의 정확한 우리말 번역이 뭔지 알 수 있었고, 그 덕에 무사히 방송을 마쳤다는 이야기.     


나중에 생각해보니 어차피 국내에 있는 헝가리 사람을 빼면 어디부터 어디까지 발언을 끊어 쓰든, 그 발언의 한국어 번역이 어떤 내용이든, 한국의 시청자들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 거라는….     


미술을 취재하다 보면 정말 가끔은 우리에게 전혀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인터뷰를 진행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의 깊게 들은 헝가리어는 완전히 새로운 언어였고, 마치 지구인의 언어가 아닌 외계어처럼 들리더군요. 살면서 헝가리어를 들은 경험 자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깝고도 먼….     


2     


이 책의 저자들은 인간 언어의 탄생 과정을 ‘제스처 게임’으로 설명합니다. 절대 입을 열거나 소리를 내선 안 되고, 오로지 몸짓과 표정으로만 상대에게 무언가를 설명해야 하죠.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 또 하나. 이 책의 6장에는 ‘전화 게임’이라는 게 나옵니다. 사람들을 한 줄로 세운 뒤 첫 번째 사람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주면 첫 참가자부터 순서대로 자기가 들은 내용을 옆 사람에게 그대로 말하죠. 마지막 사람은 자기가 들은 걸 큰소리로 외칩니다. 역시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     


그렇습니다. 지금은 종영된 추억의 KBS 예능 프로그램 <가족오락관>에 두 가지가 코너가 모두 있었죠. 저는 이 코너들을 만든 프로듀서가 틀림없이 두 가지 형태의 언어 실험을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3     


이 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영국 군함 인데버호의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1769년 천체 탐사를 위해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향하던 영국 군함 인데버호는 물과 땔감 등등을 보충하기 위해 가까운 육지에 정박합니다. 그곳은 남아메리카 대륙 최동남단 티에라 델 푸에고 제도의 굿 석세스만. 선장과 선원들은 뭍에 올라 원주민들과 만납니다. 영국에서 온 제복 입은 선원들과 옷을 거의 걸치지 않은 수렵인들의 조우. 당연히 말은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놀랍게도 이들은 몸짓과 손짓으로 의사소통에 성공했고,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합니다. 이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책에 아주 작은 흑백 도판으로 실려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풍경화가 알렉산더 뷰캔(Alexander Buchan)의 작품입니다.     


     

4     

저자들의 주장은 여러모로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꼭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책에서 음미할 만한 대목을 옮겨옵니다.     


의사소통은 모든 종에 걸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일 수 있다하지만 언어는 인간에게만 나타는 고유한 특징이다우리가 구어와 수어를 통해서건아니면 로라 브리지먼이 썼던 것 같은 촉각 언어를 통해서건 간에 언어적 제스처 게임을 벌일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내재된선천적인 소통의 요국가 언어의 근본적인 유연성과 결합할 수 있었던 덕분이다이러한 제스처 게임들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인간은 어어가 표현할 수 있는 온갖 사물에 대한 지식을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할 수 있었으며그 과정에서 언어는 다양성이라는 눈부신 정점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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