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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Mar 18. 2023

매너리즘, 현대적 예술의 탄생

조르조 바사리 <르네상스 미술가평전 4>(한길사, 2018)


한없이 더딘 독서 끝에 바사리의 미술가평전 넷째 권을 완독했습니다. 제4권은 부제목으로만 보면 24개 장으로 이뤄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르네상스 하면 떠올리는 유명한 예술가의 이름이 안 보여서, 다소 흥미가 떨어진다는 점을 더딘 독서의 변명으로 삼습니다.     


셋째 권에서 이미 소개했듯이 넷째 권의 중심은 매너리즘입니다. 원근법에 기초한 자연의 충실한 묘사에서 벗어나 화가들은 자기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매너리즘이야말로 현대적 예술의 출발점이었던 겁니다.     


바사리의 업적을 더 위대하게 한 것은 그가 당대 예술의 중심이었던 로마와 피렌체뿐 아니라 베로나, 시에나, 아레초, 페라라 등 다른 지역 예술가들을 고루 소개했다는 점, 화가, 조각가, 건축가 외에도 세공업자와 장식미술가 등을 빼놓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바사리는 자신이 직접 봤거나 만나지 않은 경우엔 주변의 여러 지인에게 부탁해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첫 장의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있죠. “나와 독자를 위해 조사에 힘쓴 여러 친구의 호의 덕분에 이 글을 쓸 수 있었음을 밝힌다.”     


첫 장에 소개된 프란체스코 몬시뇨리라는 베로나 출신 화가에 관해 흥미로운 일화가 전합니다. “후작은 그리던 개 한 마리를 데리고 그림을 보러 갔는데 이 사나운 개가 주춧돌에 그린 개를 살아 있는 개로 알고 물려고 달려드는 바람에 그만 벽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남아 있는 걸 보면,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예술품의 ‘사실성’은 만국 공통인 것 같습니다.          


마르칸토니오 볼로네세, 「루크레티아」, 1511~12, 동판화, 217×133cm, 영국박물관


16세기 초반에 활동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 판화가 마르칸토니오 볼로네세는 같은 시대 판화의 거장이었던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를 모각해 이탈리아 미술가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위 작품은 볼로네세가 라파엘로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만든 동판화입니다. 바사리는 이 작가를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이탈리아에 판화를 도입한 것은 그의 공적이며, 예술과 더불어 유능한 사람들에게 큰 이익을 주었다.”     


4권에서 가장 비중이 큰 화가는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 1499~1546)입니다. 바사리가 열전에 소개한 그 많은 예술가 가운데 드물게 끝에 연보가 실린 것으로 알 수 있죠. 매너리즘을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는 로마노의 대표작은 만토바에 있는 테 궁전에 프레스코로 그린 <거인의 방>입니다.       


줄리오 로마노, 「거인의 방」, 1526~8, 프레스코, 테 궁전, 만토바


바사리는 이 화가를 무척 높이 평가했습니다. 어느 추기경이 로마노가 바로 옆에 있는데도 바사리에게 로마노의 작품이 어떤지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의 조상을 이 도시의 길모퉁이마다 하나씩 세우고 나라의 절반에 세워주어도 그의 업적을 보상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보기 드문 극찬이죠.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교황 클레멘티우스 7세 초상화」, 1526, 캔버스에 오일, 145×100cm, 나폴리 국립미술관

  

그런가 하면 프라 세바스티아노 비니치아노 델 피옴보라는, 무척이나 긴 이름의 화가에 관한 장에서 바사리는 예술가에게 부와 명예가 때로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준엄하게 경고합니다. 델 피옴보 역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매너리즘 화가였죠. 아래 대목은 지금 읽어도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날카로운 통찰이므로 전문을 옮깁니다.     


포상과 명예는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자극해 그것을 받으려고 애쓰도록 하지만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포기해야 한다예나 지금이나 유능한 작가들에게 금전적 또는 물질적 도움을 주지 않는 군주들은 비난을 받곤 했다그러나 가끔 이 법칙이 역효과를 가져올 때가 있는데사람에 따라서는 풍요로울 때보다 빈곤에 처했을 때 외려 더 쓸모가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세바스티아노도 가난했을 때는 라파엘로와 쉴 새 없이 경쟁했지만 교황 클레멘티우스의 너그러움이 오히려 근면한 세바스티아노를 게으르게 만들고 말았다그러므로 착한 군주들은 마땅히 포상하고자 하는 사람의 천품을 잘 고려해 군주의 너그러움이 그들의 근면함을 해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시에나 태생의 화가 도메니코 베카푸미(Domenico Beccafumi, 1486?~1551)는 16세기 전반에 활동한 매너리즘 회화의 또 다른 대가로 평가됩니다. 아래 작품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저승으로 내려간 그리스도>입니다.          


도메니코 베카푸미, 「저승으로 내려간 그리스도」, 1530~35, 패널에 오일, 398×253cm, 피나코테카 나지오날레, 시에나


마지막으로 당대 매너리즘의 대가였던 야코포 다 폰토르모(Jacopo da Pontormo, 1494~1556/7)의 작품 <이집트에서의 요셉>을 소개합니다. 세로 96, 가로 109cm로 크지 않은 그림인데, 바사리가 이렇게 평했습니다. “만일 이 그림이 크기가 컸더라면 우아하지도, 완전하지도, 훌륭하지도 못한 작품이라고 나는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화가들도 이 그림을 폰토르모의 최대 걸작이라고 평한다.”          


야코포 다 폰토르모, 「이집트에서의 요셉」, 1515~18, 패널에 오일, 96×109cm, 런던 국립미술관

 

바사리가 직접 보고 평한 그림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모릅니다. 그림을 볼 수 있고, 바사리의 평도 접할 수 있으니까요.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를 주목했습니다. 첫째, 작품이 없으면 작가의 이름도 남지 않는다. 둘째, 르네상스 시대에는 페스트가 수시로 유행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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