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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May 07. 2023

미켈란젤로에게 바쳐진 바사리의 『미술가평전』

조르조 바사리 <르네상스 미술가평전>(한길사, 2018)

제5권에 이르러서야, 2천900쪽을 읽고 나서야, 마침내 만난 단 하나의 이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 바사리는 미켈란젤로가 아닌 그 누구에게도 이만한 분량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라파엘로와 다 빈치가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일 지경이죠. 미켈란젤로는 바사리가 『미술가평전』을 쓰게 한 이유였습니다.

     

<피에타>, 1499, 대리석, 높이 174cm, 성 베드로 대성당, 바티칸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을 하나만 꼽으라면 <피에타>를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이 위대한 조각품을 직접 본 지도 어느덧 10년 세월이 흘러 기억이 가물가물하군요. 십자가에서 내려진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품에 안고 비탄에 잠긴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상징하는 걸작 중의 걸작입니다. 무수하게 많은 예술가가 무수하게 많은 피에타를 그리고 조각했지만, 50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기억하는 피에타는 미켈란젤로의 그것입니다. 바사리는 이렇게 썼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온 기량을 발휘하여 완성한 이 뛰어난 조상에 나타난 디세뇨의 완벽함아취 있는 단순성표현의 진수는 작가 어느 누가 어떠한 공을 들인다 해도 도저히 흉내 내지 못할 것이다숨진 그리스도의 완전한 원근법 표현그 골격근육혈관신경팔의 위치무릎엉덩이 등 모두가 기적의 손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볼품없는 돌멩이를 오직 예술가의 손이 짧은 시일 안에 마치 신과도 같이 기적적인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따이 조상이야말로 미켈란젤로가 자기 이름을 새겨 넣은 유일한 작품이며그가 각명(刻銘)을 결심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이 조상이 안치된 방에 들어갔을 때 롬바르디아 지방에서 온 군중이 이 작품을 격찬했다그중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누구의 작품이냐고 물었는데우리 밀라노의 곱사등이의 작품이라고 했다미켈란젤로는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따가자기 작품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돌리는 것이 불쾌하여 그날 밤 촛불과 끌을 가지고 경당에 몰래 들어가서 성모 마리아가 두른 띠에 자기 이름을 새겨 넣었따한 시인은 진실과 생명이 넘치는 이 피에타에 다음과 같은 시 한 구절을 바쳤다.     


아름다움과 정결이여

한숨짓는 싸늘한 대리석 피에타여,

제발 그렇게 슬프게 울지 마세요.

머지않아 깨어날 것이니

우리 주 그리스도

당신의 배우자

아들이며 아버지

단 하나의 신부딸이며 어머니.


<다비드>, 1504, 대리석, 434cm, 아카데미아 미술관, 피렌체


이에 못지않게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또 하나의 걸작은 <다비드>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술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윗이 누군지는 잘 모를지언정 이 이미지를 한 번이라도 안 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물론 성서를 모르는 사람도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 알고 있겠죠. 바사리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 대작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아함과 아름다움과 완벽함전아한 초인적인 조화를 이루어 로마의 마르포리오와 벨베데레의 티베르강과 나일강몬테 카발로의 큰 조상들은 말할 것도 없고고금의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들을 압도했다.


이 두 대목에서 우리는 확인하게 됩니다. 둘 다 바사리가 당대에 직접 작품을 보고 썼다는 점이죠. 미켈란젤로와 같은 시기에 활동하면서 예술가로서 서로 긴밀하게 교류했기 때문에, 바사리는 자신이 당대에 미켈란젤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아는 것을 아낌없이 글로 쏟아부을 수 있었겠죠.     


앞에서 조각 분야의 걸작 두 점을 봤다면, 회화에서는 단연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가 대표작입니다. 아니, 미켈란젤로가 남긴 예술품 가운데 단 하나의 걸작을 꼽으라면, 많은 사람이 주저 없이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떠올리지 않을까요. 이 작품에 관해서도 바사리는 자세한 감상을 적었습니다.     

<아담의 탄생>, 1510, 프레스코, 280×570cm, 시스티나 경당, 바티칸

     

이 작품이야말로 여러 세기에 걸쳐 암흑에서 헤매던 모든 그림과 세계를 비춰주는 예술의 진정한 횃불이 되었다정말 화가들은 이제부터는 창의력자세의상새로운 표현방법갖가지 방법으로 표현하는 멋진 주제 등에 대하여 걱정거리가 없어졌다왜냐하면 이 제작이 예술의 모든 완벽한 부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인물들의 완벽함과 단축법의 완전함윤곽의 놀랄 만한 충실감나상들의 우아함과 매혹적인 균형 등은 보는 사람을 아연케 한다.   


<최후의 심판>, 1536~1541, 프레스코, 13.7×12m, 시스티나 경당, 바티칸


최후의 심판은 신이 지상에 보내신 어떤 사람에게 어느 정도 예지를 안겨주실 수 있는지를 보여준 위대한 표본으로 생각된다회화 예술을 체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미켈란젤로가 그린 인물화의 필치에 놀라서 떨 것이다미켈란젤로의 이 노작을 본 화가들은 과거와 현재의 다른 작품들을 그의 작품과 어떻게 비교할 수 있을지 혼란을 느낄 것이다.


바사리에 따르면, 미켈란젤로 초상화는 당대에 두 점뿐이었다. 하나는 부자르디니가 그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야코포 델 콘테가 그린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비상한 기억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한 번만 봐도 정확하게 기억해 남모르게 자기 작품에 이용할 수 있었다고 바사리는 적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그린 무수한 작품 속 인물 가운데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바사리는 그 이유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어느 날 친구인 한 성직자가 그에게 "당신은 왜 결혼하지 않았습니까당신의 걸작들을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터인데"라고 묻자 "내게는 나를 괴롭히는 처가 한 사람이 있습니다즉 예술은 내 아내이고 작품은 내 아들입니다."


예술과 결혼한 남자. 미켈란젤로답다고 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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