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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Dec 07. 2023

한국화의 변화와 혁신을 이끈 두 거장의 만남

[석기자미술관]③필묵변혁: 송수남 황창배


한국화가 설 자리는 어디인가? 왜 한국화는 이토록 차갑게 외면받는가? 현실이 어떤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현대 한국화가 이뤄놓은 성과가 보잘것없다고 감히 함부로 예단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지난가을 목포와 진도에서 열린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에서 나는 그동안 몰랐던 훌륭한 한국화가들을 여럿 발견하는 기쁨을 누렸다. 한국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했다. 기실 한국화가 외면받는 가장 큰 이유는 미술판의 무지와 무관심일 터.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현대 한국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화가의 작품을 나란히 조명하는 중요한 전시회가 막을 올렸다. 남천 송수남(1938~2013) 그리고 소정 황창배(1947~2001). 남천은 1970년대 후반에 수묵화 운동을 이끈 뛰어난 화가이자, 홍익대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화단의 중추를 이룬 제자들을 길러낸 교육자였다. 소정은 한국화의 파격과 혁신을 통해 미술계 최고의 스타로 당대에 이름을 날린 선구적 예술가였다. 한국화의 부흥 그리고 혁신. 내용은 달랐어도 두 화가의 꿈은 하나였다.     


송수남 <붓의 놀림>, 2003, 개인 소장
황창배 <무제>, 1992, 개인 소장


두 화가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이 입구에 나란히 걸렸다. 전시는 첫 전시실인 미술관 1층 1관부터 지하 1층 2관까지 두 화가의 작품 세계를 가장 최근 것부터 가장 오래된 것 순으로 더듬어 올라간다. 전시공간을 아홉 개 섹션으로 나눠 두 화가의 그림을 한 공간에 나란히 걸기도 하고, 또 각자의 작품을 시기별, 주제별로 볼 수 있도록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시 구성이 좋다. 두 화가의 작품을 꽤 많이 보여주는 데도 난삽함이라곤 없다. 미술관 공간을 효과적으로 잘 활용했을 뿐 아니라, 꾸밈새에도 정성을 꽤 많이 들인 흔적이 보인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기증작을 비롯해 남천의 대작이 꽤 많이 나왔고, 그동안 못 봤던 소정의 중요한 작품도 오랜만에 전시장을 한껏 채우고 있다.     


송수남 <붓의 놀림>, 1997, 국립현대미술관
황창배 <무제>, 1994, 개인 소장


첫 번째 섹션은 이번 전시의 큰 그림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남천과 소정 두 화가가 부단한 변화와 혁신을 통해 어떤 예술 세계에 이르렀는지를 만년의 대표작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붓의 놀림>이라는 제목이 붙은 일련의 작품은 부단한 필묵 실험을 통해 구체적인 형태를 벗어난 추상의 세계로 나간 남천의 예술 세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번 전시의 표제작 이미지로 쓰인 소정의 작품은 캔버스 안에 자기만의 거대한 우주를 담고자 했던 화가의 야심과 의지를 엿보게 한다.     


황창배 <무제>, 1991, 개인 소장
황창배 <무제>, 1993, 개인 소장

 


두 번째 섹션은 황창배 예술의 궁극이라 할 파격(破格)의 정체를 확인하는 자리다. 한국화라는 전통적인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동서양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재료와 기법 등에도 전혀 얽매이지 않았던 화가의 거침없는 예술이 한자리에 펼쳐진다. 일찍이 철농 이기우 선생으로부터 전각을 제대로 배운 화가답게 그림 한 귀퉁이에 직접 그려 넣은 낙관조차 과연 황창배답다고 할밖에.     



실제로 세 번째 섹션에 전시된 앞선 시기의 작품에서 보이는 전각가 황창배의 다채로운 면모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모양도 제각각, 글씨도 제각각인데, 그것 자체가 그림 안의 또 따른 예술이어서 전각만 따로 자세히 들여다보는 재미가 남다르다. 황창배라는 화가의 깊은 내공을 확인할 수 있는 흔적들을 따로 모아 보니 더 놀랍다.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은, 황창배는 그런 화가였다.     


황창배 <무제>, 1986, 개인 소장

 


그중에서도 유독 내 시선을 사로잡는 그림이 있었으니 1986년 작 <무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면 아래에 보이는 글씨를 마치 숲을 산책하는 이들처럼 재치있게 그려 놓았다. 그걸 자연스럽게 서명으로 이어간 뒤 마지막 인장 쾅. 자세히 보니 ‘황씨’라고 찍었다.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한 획 한 획 그어가면 나도 모르게 잡된 생각이 사라진다.

붓질은 영혼의 빗질이다. - 송수남     


송수남 <여름나무>, 2000, 국립현대미술관
송수남 <붓의 놀림>, 2008, 국립현대미술관

       

네 번째 섹션은 남천 송수남 화백의 대표작을 보여준다. 형태를 지우고 단순화한 그림 앞에 서면 당연히 더 깊은 상상을 하게 된다. 남천의 부단한 실험은 꽤 다채로운 변주를 보여주지만, 필묵이라는 단단한 토대만은 어떤 경우에도 잃지 않는다. 그래서 가만히 작품을 들여다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심상이 있다. 미술관에 기증된 대작들은 그동안 한 번도 못 본 것들이어서 감상하는 기쁨이 더 각별하다.     


송수남 <붓의 놀림>, 1995, 국립현대미술관

    

황창배 <무제>, 1998, 개인 소장


두 화가의 예술이 완숙기에 이르는 1990년대 작품들로 구성한 다섯 번째 섹션을 지나 지하 1층 2관으로 걸음을 옮긴다. 섹션 6은 남천의 대표 연작인 <붓의 놀림> 작품들로 채워졌고, 그다음 섹션 7은 당대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소정의 대범한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남천의 작품은 못 보던 것들이 대부분이고, 소정의 작품도 지난해 김종영미술관 전시와 그 이전에 황창배미술관에서 본 것이 적지 않은 데도 새로운 작품이 꽤 많다. 그만큼 황창배라는 화가의 세계는 크고 넓었다.     


전통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지

숭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황창배     


송수남 <산수>, 연도미상, 개인 소장

    

송수남 <산수>, 연도미상, 조선화랑


송수남 화백이 1970년대 80년대에 그린 산수화도 참 좋다. 그 특유의 독창적인 수묵산수를 ‘남천 산수’라 부른다고 한다. 수묵화 운동을 전개한 시기의 작품들이다. 이전 세대의 그림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송수남 <붓의 놀림>, 연도미상, 개인 소장


그 뒤로 소품들 가운데 묵희(먹 장난)라 해도 좋을 아주 사랑스러운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먹을 중심으로 봐도, 여백을 중심으로 봐도 참 재미있는 그림이다. 놀면서 그린다는 얘기가 참 잘 맞아떨어진다.

     

여덟 번째 섹션을 지나 마지막 전시 공간인 아홉 번째 섹션에 이르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황창배의 대작을 만날 수 있다. 

     

황창배 <무제>, 1994, 개인 소장


이전 시기 작품들과 달리 인물, 동물, 새, 꽃, 풀, 달까지 황창배 예술의 키워드인 ‘자유로움’을 한껏 집약해 놓은 듯 밝고 화사함이 가득하다. 생전에 ‘언덕에서 내리막길로 자동차를 타고 내려오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라 했을 만큼 새로운 예술, 독창적인 예술을 향한 화가의 고뇌는 깊었다. 그 고뇌의 흔적을 어렴풋이나마 가만히 따라가 보는 것, 그것이 전시를 감상하는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한국화는 일찍이 이 두 선구자를 만나는 행운을 얻었지만, 그 성과와 에너지를 더 큰 바람으로 이어가지 못했다. 더 늦기 전에 두 거장의 업적에 합당한 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이고, 머지않은 시기에 국립미술관에서 어엿한 전시가 열리길 기대한다. 한국 미술사에서 중요한 두 화가를 한자리에서 만날 절호의 기회다. 올해의 대미를 장식할 최고의 전시를 통해 한국화의 멋과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는 안복(眼福)을 마음껏 누리시길.


■전시 정보

제목: 필묵변혁: 송수남 황창배

기간: 2024년 1월 14일(일)까지

장소: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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