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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Apr 15. 2024

추상미술이 이토록 뜨거운 것이었다니

석기자미술관㊲ 빅토르 바자렐리 <반응하는 눈>


뜨거운 추상이 있고 차가운 추상이 있다. 학교에서 배운 추상미술은 이렇게 기억된다. 교과서에서 본 대로 이해하고 암기하면 끝. 학교 미술 교육에 그 이상은 없다. 구체적인 형상이 드러나는 구상과 달리 추상은 미술을 한없이 어렵게 만든다. 화가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뭘 그린 건지 알 길이 없다. 그러니 감흥은 더더욱 없을 수밖에.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은 수많은 사람을 눈물짓게 했다는데, 그런 신비 체험에 가까이 가본 적조차 없다. 그러므로 추상은 난감하다.     


미술사가 황정수 선생님의 추천으로 찾은 빅토르 바자렐리의 전시는 그런 내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우리가 추상미술 작품 앞에서 길을 잃는 까닭은 화가의 예술이 어떻게 거기에 이르게 됐는지 이해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관람객은 전문적인 미술 연구자가 아니므로, 전시가 그걸 쉽게 알려줘야 한다. 적어도 추상미술은 최소한의 정보가 있어야 감상의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있다. 바자렐리의 전시는 그런 면에서 근래 보기 드문 ‘완성도’를 보여준다.     


     


빅토르 바자렐리(Victor Vasarely, 1908~1997)는 헝가리에서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화가다. 서양미술사에서 옵티컬 아트(Optical Art), 줄여서 옵 아트의 창시자로 평가되는 중요한 작가다. 옵 아트란 정교한 수학적 계산과 광학 이론을 토대로 만든 작품을 일컫는다. 대단히 과학적이고 체계적이며 이지적인 예술이다. 그렇다면 또 어려운 길로 가는가? 천만에. 전시를 보고 나면 화가가 어째서 그 길에 이를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된다.     



헝가리에서 미술을 배운 뒤 파리로 건너간 바자렐리는 처음엔 디자이너로 일했다. 전시장에 걸린 여러 작품은 바자렐리가 일찍이 디자이너로서 뛰어난 재능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디자인 분야에서 괄목할 성과를 거두며 승승장구하던 와중에도 바자렐리는 그래픽 예술을 통해 빛을 이용한 광학 효과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의 습작과 드로잉에서 일정한 도형, 무늬, 운동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다.     

상업미술에서 순수미술로 나아가는 과정은 물론 쉽지 않았을 터. 바자렐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 이미 그래픽 디자이너가 아닌 순수 예술가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뒤 1~2년 동안에는 당시 미술계의 최신 유행이었던 추상미술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시도하기도 했다. 화가 자신은 이 시기를 훗날 ‘잘못된 길’이라 했다지만, 그 시대를 지배하는 다양한 예술적 조류를 흡수하고 모방하는 과정이 화가에게 어떤 형태로든 자양분이 됐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화가에게 영감을 준 것은 자연이었다. 바자렐리는 프랑스 북부 해안에 머무는 동안 바닷물의 프리즘 현상, 모래의 광택이 나는 자갈, 돌의 생생한 대비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이 시기의 작품에선 가시적인 세계를 일정하게 추상화한 형상으로 단순하고 간결하게 압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곡선의 시기다.     


또 다른 영감의 원천은 건축물이었다.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었던 프랑스 남부의 외딴 마을에서 화가는 중세 건축물인 수도원은 물론 마을을 이루는 석조주택을 관찰하고 그것들로부터 끊임없는 영감을 얻었다. 파리를 오가는 지하철역에서도 무언가를 찾아냈다.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화면에 서서히 변화가 생겼다.    

  


바자렐리는 그렇게 선의 세계, 면의 세계로 차근차근 나아갔다. <트링코-F>라는 작품에서 우리는 작은 사각형의 모양이나 각도를 조금만 달리해도 화면에 얼마나 큰 변화를 줄 수 있는지 생생하게 목도하게 된다. 화가는 명과 암의 대비, 도형의 방향 변화 등을 통해 끊임없이 그 운동성을 실험했다.     


그리하여 ‘팽창하고 수축하는 우주의 구조’라는 제목이 붙은 방에 이르면 비로소 이 화가가 다다른 종착점인 ‘우주’를 만나게 된다. 바자렐리의 작품은 착시 효과를 주기 때문에 관람자가 보는 각도에 따라 변화의 폭이 크다. 마치 매직 아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질서정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무수히 변화하는 이미지들은 놀랍도록 신비롭다.     


1970년대에 주로 만들어진 바자렐리의 작품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 봐도 시대에 뒤떨어지기는커녕 색채와 형태, 구성 등 모든 면에서 현대적이고 세련된 감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화가는 자기만의 조형 언어로 더 크고 아름다운 추상 세계로 성큼 나아갔다. 평면 위에 구현한 키네틱 아트라 해도 좋을 만큼. 그러니 얼마나 많은 예술가가 그로부터 영감을 받았겠는가.     

전시 관람의 막바지에 이르면 바자렐리의 생전 모습이 담긴 아카이브 영상 두 편을 만날 수 있다. 영상을 보고 나면 바자렐리가 얼마나 위대한 예술가였는지 알게 된다. 바자렐리는 옵 아트라는 자기만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세계로 나아간 과정을 설명할 줄 알았던 드문 예술가였을 뿐 아니라, 제도권 미술의 고답적 행태를 비판하면서 예술적 탐험의 최종 목적지에 ‘차별 없는 대중’이 있어야 한다고 믿은 인간적인 예술가였다. 추상미술이 이토록 뜨거운 것일 수 있다니.     


무릇 좋은 전시는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이 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해야 하고, 대표작이라 부를 만한 수준 있는 작품을 보여줘야 한다. 볼거리가 풍부하면서도 공부가 되는 전시여야 한다. 관람객이 미술에 한 걸음 다가서게 해주어야 한다. 좋은 전시는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이 전시는 그런 조건을 두루 충족한다.     



헝가리 국립 부다페스트 미술관과 바자렐리 미술관이 소장한 작품 200여 점을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인다. 빅토르 바자렐리라는 이름을 몰라도 좋다. 전시를 보고 나면 아, 추상미술이라는 게 이런 의미가 있는 거구나, 추상미술이 꼭 어려운 것만은 아니구나, 깨닫게 된다. 전시 기간이 얼마 안 남았다.     


“나는 순수한 형태와 색으로만 세계를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다.”     



전시 정보

제목빅토르 바자렐리 <반응하는 눈>

기간: 2024년 4월 21()까지

장소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1

문의: 1661-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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