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㊳ 서울옥션 제178회 미술품 경매 프리뷰
먹 선으로 윤곽만 잡아낸 얼굴. 물고기 모양으로 그린 눈매, 뭉툭한 코, 크고 후덕한 귀, 작게 앙다문 입. 머리카락이며 수염, 눈썹까지 무심한 듯 몇 가닥 선으로 표현하고 말았고, 입술에는 빨간색을 입혔다. 큰 고민 없이 먹을 바른 어눌한 모자, 직선으로 그어 내린 옷 주름 표현까지 어찌 그리 수더분하고 천진한가.
초상화의 주인공은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어릴 적부터 일찍이 천재라 일컬어질 정도로 출중한 인물이었으나,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분노하며 책을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전국을 방랑했던 바로 그 김시습이다. 보물로 지정된 불교중앙박물관 소장 <김시습 초상>을 보면, 위 그림이 바로 이 초상화를 본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소략한 김시습 초상화는 중국의 역대 군신 초상을 임모해 묶은 『명현초상화첩(明賢肖像畵帖)』에 실린 것이다. 화첩은 총 4권으로, 1권에는 중국 신화와 상고시대, 2권에는 진․한․위진남북조 시대, 3권에는 당․오대․송나라, 4권에는 남송과 명나라 인물 초상화가 실렸다.
재미있는 건 4권에 조선 사람 네 명의 초상화가 실렸다는 점이다.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시습이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 성리학의 중요 인물들을 가려 뽑은 거로 보인다. 이 네 권짜리 화첩이 서울옥션 제178회 미술품 경매에 나왔다. 추정가는 1천만 원에서 3천만 원.
이번 서울옥션 경매에는 특히 고미술 분야에서 귀한 글씨(書)와 그림(畵)이 여럿 출품돼 관심을 끈다. 먼저 글씨로는 조선 전기 초서(草書)의 대가로 이름을 날린 고산 황기로(黃耆老, 1521~1575 이후)의 것이 단연 두드러진다. 빠르게 써 내려간 황기로 특유의 초서가 유려하고, 끝에 고산(孤山)이라는 주문방인(네모꼴에 붉은 글씨 인장)이 찍혀 있다.
황기로의 글씨는 전하는 것이 드물어 귀한 데다가, 한말 근대기의 대수장가이자 서화가였던 위창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이 직접 감정하고 적은 배관기와 더불어 소장했다는 글귀까지 함께 남아 있어 가치를 더 높인다. 경매 추정가는 1천2백만 원에서 2천만 원.
다음으로 경매번호 84번인 면앙정 송순의 <간찰(簡札)>, 85번 퇴계 이황의 <시고(詩稿)>, 86번 송강 정철의 <간찰(簡札)>, 88번 추사 김정희 등의 <간찰첩(簡札帖)>에 이어 89번인 헌종대왕의 <어필첩(御筆帖)>까지 쟁쟁한 글씨들이 새 주인을 찾는다.
그림으로는 조선시대 채색장식화의 높은 수준을 가늠하게 하는 대폭의 석 점이 단연 주목된다. 먼저 여덟 폭짜리 병풍 형태의 <모란도>는 폭마다 도침 장지 바닥을 그대로 사용한 점이 예사롭지 않고, 선묘와 채색, 화면 구성 등 모든 면에서 풍요로움과 상서로움이 가득한 명품 중의 명품이다. 추정가는 4억 원에서 6억 원.
당나라의 유명한 장수였던 곽자의(郭子儀, 697~781)는 무려 9년 동안 나라를 뒤흔든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85세까지 장수하며 자손을 많이 얻었고 부귀영화까지 누려 후대에 성공한 인생의 상징으로 부러움을 샀다. 분양왕이라는 작위를 받은 덕분에 곽분양이라고도 불렸으니, 그런 그의 성대한 생일잔치를 담은 그림이 바로 <곽분양행락도>다.
생전에 이만한 영화를 누릴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화면 가득 풍요와 웃음이 흘러넘친다. 전각 지붕 장식 등에 금가루를 바른 것을 보아 궁중용으로 그려졌음을 짐작게 한다. 세로 4m에 가까운 8폭 병풍 대작으로 높은 가치를 지녔다. 경매 추정가는 3억 원에서 5억 원.
서왕모(西王母)가 산다는 곤륜산 요지(瑤池)에는 삼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 천도나무가 있어 그 열매가 탐스럽게 익은 것을 축하하는 잔치가 벌어졌다. 당연히 내로라하는 신선들이 모두 초대 손님으로 참가했으니 그 성대함을 이루 말할 수 없으리라. 바로 이 장면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 바로 <요지연도(瑤池宴圖)>다.
출품작은 12폭에 이르는 대형 병풍으로, 세로가 앞선 <모란도>보다 더 긴 4.3m나 된다. 보존 상태가 좋고 누락된 폭 없이 12폭의 완전한 형태를 갖췄다는 점, 화려한 채색과 숙련된 필치로 대폭의 화면을 능란하게 구성했다는 점 등에서 대단히 수준 높은 장식화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경매 추정가 4억 5천만 원에서 8억 원.
이 밖에 묵죽화가로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던 수운 유덕장의 <묵죽도(墨竹圖)>, 매화 그림에서 일가를 이룬 우봉 조희룡의 <괴석묵란도(怪石墨蘭圖)>와 <묵매도(墨梅圖)> 한 쌍, 오원 장승업의 대표 화목으로 잘 알려진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 이당 김은호의 <미인도> 또한 주목에 값한다.
서화 외에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1855년에 제작된 세계지도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다. 1807년 일본 에도 막부는 손아귀를 뻗쳐오는 열강에 대비하고자 기존 지도를 대체할 새로운 세계지도를 제작하게 했다. 1810년에 완성된 지도는 이후에 다양한 주체에 의해 거듭해서 재제작되는데, 출품작은 1810년 원본을 충실히 반영해 1855년에 만든 것으로 본다.
이 지도의 사료 가치를 한층 높여주는 대목은 일본 정부가 제작한 지도에 동해(東海)를 조선해(朝鮮海)로 표기해놓은 점이다. 과거 일본이 동해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 가운데 하나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해 KBS의 <TV쇼 진품명품>에서 감정가 5천만 원을 기록하며 큰 관심을 받았다. 경매 추정가는 3천만 원에서 5천만 원.
근현대 작품으로는 조각가로 유명한 문신(1923~1995)의 1947년 회화 작품 <잔설>, 추상화가 남관(1911~1990)의 1949년 작 <해바라기>, 농원의 화가 이대원의 1959년 작 <북한산>이 주목된다. 전성기에 앞서 작가들의 초창기 화풍을 보여준다는 점과 1940~50년대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희소가치가 크다는 평.
이 외에 한국 실험미술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인 이건용의 대표적 퍼포먼스 <달팽이 걸음>의 결과물이 처음으로 경매에 나왔다. 이건용 작가가 197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처음 선보여 화제가 된 <달팽이 걸음>은 쪼그려 앉아 분필로 선을 그리는 동시에 맨발로 그 흔적을 지워나가는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출품작은 2007년 인천 부평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한국-터키 수교 50주년 기념전>에서 진행된 퍼포먼스의 결과물로, 당시 관람객들이 직접 적은 메시지가 함께 남아 있다. 추정가 2억 원에서 3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