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 땀 한 땀의 예술…자수의 재발견

석기자미술관(74)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by 김석

1. 포스터


<정야>는 김혜경의 이화여대 자수과 졸업 작품이다. 당시 미술대학 교수였던 화가 김인승(1910~2001)에게 밑그림을 받아 그 위에 직접 수를 놓았다. 벽난로 앞에서 불을 쬐며 책을 읽는 여성은 자수 소재로 무척 새로웠다. 작가는 다양한 자수 기법 대신 평수를 주로 사용해 전면을 메웠는데,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색감과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 섬세한 디테일이 돋보인다. 특히 한복 주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바늘땀의 선, 한복과 소파, 카펫의 촉감 등에서 자수의 매력을 십분 느낄 수 있따. 무엇보다 주위로 퍼져 나가는 난로의 온기와 불빛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이번 전시의 포스터를 장식했다.


1.김혜경, 정야, 유족 소장.jpg 김혜경 <정야>, 1949, 비단에 자수, 92×66cm, 유족 소장


김혜경(1928~2006)은 개성 출신으로 손재주가 뛰어난 어머니에게 자수를 처음 배웠다. 국내 최초로 자수과가 생긴 이화여대를 나와 모교 교수를 지냈다. 사실주의 화풍의 섬세한 자수부터 추상자수, 전통자수 등 다양한 기법에 능했던 김혜경은 “여성이면 누구나 수를 놓을 줄 안다는 통념 때문에 수를 체계화하고 정리하지 못한” 데 아쉬움을 느껴 1983년 『수(繡): 기초기법』이란 개론서를 냈다.


2. 리플렛


<벽걸이>는 제16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공예부 문교부장관상 수상작으로 전위적인 추상 자수를 실험한 송정인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다. 작가는 바탕천에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천 조각을 이어붙이고, 그 위에 다양한 색과 질감의 실로 수를 놓았다. 사각형, 삼각형, 원, 마름모 등 기하학적인 형태들과 비정형적인 형태들이 다양한 변화를 생성해가며 다성(多聲)의 화음을 만들어낸다. 조화로운 색과 형태의 배치로 리드미컬한 공간이 만들어진 위에 섬세한 디테일이 더해져 화면은 다채롭고 생동감으로 충만하다. 대강의 구성은 화가 송혜수가 지도했으나, 작업이 진행되면서 작가의 개성과 표현력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번 전시의 리플렛 표지를 장식했다.


20240730_123616.jpg 송정인 <벽걸이>, 1967, 마대에 염색, 자수, 작가 소장


송정인(1937~)은 경남 통영 출신으로 1960년에 부산으로 가 수산 권복해에게 자수를, 화가 송혜수에게 회화를 배웠따. 전통적인 자수 기법과 도안, 재료를 거부한 실험적인 추상 자수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에서 수상했다. 서울로 올라가 인사동에 전통공예 전문 화랑 ‘꽃가마’를 열어 전통공예 보급에 나섰고, 주재원과 외교관 등의 부인 모임인 국제부인회에서 전통자수를 가르치기도 했다. 1966년 부산과 마산에서 연 첫 개인전 이후 국내외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열었다.


3. 자수상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산봉우리 앞에 안개 짙게 드리워진 골짜기가 겹겹이 펼쳐져 있다. 어딘지 낯익은 절경을 눈에 재대로 담으려는 순간 보는 이의 시선은 화면 속 인물의 등에 부딪히고, 멈춘다. 이 장엄한 풍경은 19세기 유럽에서 전개된 낭만주의 미술의 대표작 중 하나인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속의 방랑자>에서 차용했지만, 등을 보인 채 절벽에 서 있는 주인공은 프리드리히 작품 속 청년이 아니라 홑겹의 푸른 원피스를 입고 거칠고 신비로운 대자연과 마주한 중년 여성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인생의 말년에 지나간 세월을 되돌아보며 딸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자수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담은 작품이다. 자화상을 제작한 자수 작가가 없는 현실을 떠올리면, 뒷모습을 묘사한 이 자화상은 더 귀하다.


3.5.이장봉, 파도, 유족 소장.jpg 이장봉 <파도>, 1995, 비단에 자수, 80.5×66cm, 유족 소장


자기 모습을 자기가 그린 것을 자화상(自畵像)이라 하고, 깎거나 빚은 것을 자소상(自塑像)이라 한다. 그러므로 자기 모습을 자기가 직접 수 놓은 것을 자수상(自繡像)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이장봉(1917~2016)은 함흥 영생여고를 나와 일본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했다. 귀국에 춘천여고 교사로 일하다 결혼 후엔 가정생활에 집중했다. 1960년대부터 다시 자수 작업을 시작하면서 이장봉 자수연구소를 운영(1961~1975)했다. 대규모 전통자수 병풍부터 일본에서 배운 사실적이면서 감각적인 화조, 추상자수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4. 소장품


엄정윤 작가가 추운 겨울 유리창 내부와 외부의 온도 차에 의해 만들어진 얼음 결정(성에)이 만들어낸 이미지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검정 바탕에 흰색, 청색, 회색 등 제한된 색의 실을 사용해 땀의 길이와 방향을 섬세하게 조절해가며 작품을 완성했다. 독특한 기법이나 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프랑스 자수실을 재료로 주로 평수로만 제작했는데도 서늘한 겨울 풍경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이미지가 화면 위에 유려하게 펼쳐진다. 실로 만들어낸, 힘차면서 부드러운 선의 강약과 리듬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이 됐다.


3.3.엄정윤, 유리창에 서려든 성에의 자연, MMCA.jpg 엄정윤 <유리창에 서려든 성에의 자연>, 1985, 섬유에 자수, 61.5×8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엄정윤(1927~)은 해방 후 이화여대 자수과에 입학해 일본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유학한 장선희, 주순목, 조정호 등에게 자수를 배웠다. 자수는 순수예술이 아니란 당시 미술계의 선입견에 맞서 ‘자수의 조형예술에 있어서의 위치’라는 석사학위 논문(1962)을 발표했다. 모교 자수과에서 35년 동안 후학을 양성했다. 엄정윤은 자연에서 받은 영감을 토대로 조화로운 배색과 풍성한 질감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추상 자수 작품을 주로 제작했다.


5. 여고생


흰 등나무 꽃이 탐스럽게 핀 아래 공작 한 쌍이 노니는 장면을 섬세하게 수놓은 병풍이다. 동아시아에서 공작은 지식과 부귀를 상징해 모란과 함께 그려진 경우가 많았는데 점차 그 상징성보다는 화려한 외형이 돋보이는 소재가 되었다. 윤택 있는 실로 수를 놓아 부드러운 등나무 꽃잎과 공작의 화려한 꼬리 깃털의 질감이 두드러져 사실감을 더한다. 숙명여자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3년에 걸쳐 공동제작한 작품이다.


2.5.숙명여고보 공동제작, 등꽃 아래 공작.JPG 숙명여고보생 공동제작 <등꽃 아래 공작>, 1939, 비단에 자수, 212.5×341.2cm, 숙명여자고등학교 소장


밑그림은 당시 학교 미술 교사였던 이영일(1904~1984)이 지도했다. 이영일은 사실성과 장식성을 융합한 근대적인 화조화로 유명한 일본의 관변작가 이케가미 슈호(池上秀畝)를 사사했는데, 슈호는 조선미전을 통해 시조파(四條派) 화풍의 공작도를 조선에 유행시킨 인물이다. 시조파 화풍의 공작도는 일본 메이지 시대부터 구미 수출용 자수의 대표적인 소재 중 하나였고, 공작도를 포함한 시조파 화풍의 화조도는 당시 한국의 여학교에서 자수로 즐겨 제작됐다. 공작도는 1960-80년대 수출용, 장식, 예단용, 선물용 자수 병풍으로 인기가 좋았다.


6. 줄서기


20240730_120702.jpg


무척이나 더운 날 뙤약볕 아래에서 미술관에 들어가기 위해 길게 줄을 서는, 근래 보기 드문 풍경이 펼쳐졌다. 학교 방학과 기업 휴가가 겹친 모양이다. 회화도 아니고 자수 전시에 이렇게 많은 관람객이 몰리는 건 이례적인데, 아무래도 좋은 전시라는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것 같다. 50대 이상 여성들, 특히 고령의 할머니들이 많은 것은 자수에 대한 어떤 기억이나 추억을 이 전시가 불러내기 때문이리라.


자수(刺繡)라는 분야를 미술관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전례가 없거니와 앞으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만한 자수 전시를 다시 보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미술관 학예사들이 작품 대여에 깨나 애를 먹었다고 하니 아무쪼록 좋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적잖은 위로가 되었기를. 전시 종료가 얼마 안 남았다. 미리 온라인으로 예약하면 이 무더위에 줄 안 서도 된다.


■전시 정보

제목: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기간: 2024년 8월 4일(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문의: 02-2022-0600


20240730_124403.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는 자유롭기 위해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