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7년 10월, 명량에서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전투가 끝난 뒤 전남 신안군 압해도와 암태도 사이에 있는 당사도(唐沙島)로 진을 옮긴다. 이후 서해를 따라 북진해 신안군 최북단에 있는 어의도(於義島) -> 전남 영광군 법성포(法聖浦) -> 전북 부안군 위도(蝟島) -> 전북 군산시 고군산도(古群山島)로 진출했다가 다시 변산 -> 법성포 -> 어의도로 이어지는 해로를 따라 전남 해남군 우수영으로 돌아왔다. 직후 전남 신안군 안좌도(安佐島)에서 한동안 머물다가 목포로 이동해 고하도(高下島)에 진지를 구축하기로 한다. 1597년 음력 10월 29일 이순신의 일기는 이렇게 전한다.
“배를 띄워 목포(木浦)로 향했다. 보화도(고하도)에 정박하였는데, 서북풍을 막을 만하고 배를 감추기에 아주 적합하였다. 그래서 육지로 내려서 섬 안을 돌아보니 지형이 아주 좋으므로 진을 머무르고 집 지을 계획을 세웠다.”
목포 내륙에서 목포대교를 건너면 고하도가 나온다. 고하도 동쪽 바닷가에 조선 수준이 주둔했던 진성(鎭城)과 이순신을 기리는 비석이 남아 있으니, 이 둘을 묶어 ‘고하도 이충무공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10호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다. 이충무공 기념비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멀리 바다를 내다보면 이순신이 왜 이곳에 진지를 구축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전남 신안군은 ‘천사의 섬’이라 불릴 만큼 바다 곳곳에 크고 작은 수많은 섬이 흩어져 있는 데다 섬과 섬이 엇갈리고 겹쳐지며 시야를 가리는 까닭에 큰 바다에서 들어오는 적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한마디로 천혜의 요새인 셈이다. 입구의 안내판은 이렇게 전한다.
“충무공 이순신은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후 수군의 재정비를 위해 40여 일에 걸친 탐색 끝에 진(鎭)을 설치할 곳을 고하도로 정하였다. 고하도가 영산강 하구를 통해 호남 곡창 지대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며 서남해와 내륙을 잇는 전략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1597년 10월 29일 고하도로 들어온 이충무공은 1598년 2월 16일 고금도로 진을 옮기기까지 106일을 머무르며, 군량미 수만 석을 비축하고 병사를 모아 훈련하였으며 전선 40여 척을 확보하였다. 고하도에서의 수군 재건은 노량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7년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고하도 이충무공 기념비’는 1722년(경종 2) 당시 삼도수군통제사 오중주와 충무공의 5대손 이봉상이 세웠다. 비문은 남구만이 지었고 글씨는 조태구가 썼다. 몸돌의 높이는 227cm, 너비는 112cm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일제강점기에 야산에 버려졌다가 해방 후 지금 자리에 다시 세웠다. 일본인들이 쏜 총탄 자국이 몸돌에 남아 있다. 기념비를 감싼 비각은 해방 이후 시민 모금으로 지었고, 1963년 낡은 건물을 개보수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마다 4월 28일 이곳에서 이충무공 탄신제를 올린다.
바닷가 공터에 차를 세운 뒤 바다를 옆에 끼고 계단을 오르면 초입에 ‘이 충무공 기념비’의 내력을 적은 비석이 서 있고, 조금 더 걸음을 옮겨 기념비로 꺾어 돌아가는 자리에 최근에 설치한 거로 보이는 안내판이 보인다. 눈을 들어 언덕 위를 바라보면 소나무 숲 사이로 홍살문이 늠름하다. 계단을 오르면 문에 이른다. 모충문(慕忠門). 말 그대로 충무공을 그리워하는 문이다. 글씨는 전남 신안군 비금도 출신의 서예가 우하 김정재(宇下 金正財, 1930~1998)가 썼다.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 저편으로 커다란 소나무들의 호위를 받는 단아한 비각이 보인다. 모충각(慕忠閣). 충무공을 그리워하는 집이란 뜻이다. 비각 안에 비석이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 볼 수는 없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때가 짙다. 올해 2월, 비석의 훼손이 심각해 붕괴 위험까지 있다는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가 나왔다. 더 늦기 전에 해법을 찾길 기대한다. 비석 상태만 빼면 전체적으로 유적지는 모나지 않게 꾸며져 잘 관리되고 있다.
<신정역주 이충무공전서>를 얼마 전 완독했다. 마침 목포에 내려올 기회가 생겨 가장 먼저 이곳을 찾아 인사드렸다. 삼가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