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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앞에 서 있는 내 안의 감정을 그린다

석기자미술관(75) <올리비에 드브레: 마인드스케이프>

by 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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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드브레(Olivier Debré, 1920~1999)라는 낯선 화가의 전시가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난생처음 듣는 이름이다. 애초에 큰 기대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예단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시가 훌륭하다.


20240731_144146.jpg 풀밭 위의 소녀, 1940, 캔버스에 유채, 46.5×61.5cm



올리비에 드브레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17살 되던 1937년 파리 세계박람회 스페인관에서 본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에서 큰 감화를 받았다. 그해 파리의 유명한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들어가 건축을 공부했고, 현대 건축의 선구자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작업실을 드나들며 배웠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드브레는 전쟁을 피해 파리 남서쪽 투렌(Touraine) 지역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 그림에는 인상주의의 영향이 짙다. 전시장 초입에 걸린 1940년 작 <풀밭 위의 소녀>가 대표적이다.


20240731_144658.jpg 거울 속 검은 추상화, 1946, 캔버스에 유채, 55×45.5cm



드브레는 1941년 파리에 있는 조르주 오브리의 갤러리에서 몇 작품을 처음으로 발표했는데, 이때 전시된 그림 <풀밭 위의 소녀>를 본 피카소가 드브레를 자기 작업실로 초대했다. 이 만남을 계기로 드브레는 입체주의의 수혜를 받는다. 1946년 작 <거울 속 검은 추상화>는 신문지와 깨진 거울 조각 등을 활용한 작품으로, 피카소의 입체주의로부터 받은 영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20240731_144611.jpg 나치의 사악한 미소, 종이에 목탄, 수묵, 62×47.5cm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을 향해 치달을수록 나치 독일의 만행은 그 도를 더해갔다. 1944년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의 존재가 공식 확인되면서 나치의 끔찍한 잔혹 행위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십 대 청년 드브레는 수용소에서 자행된 끔찍한 유대인 학살이 부른 공포심을 인질과 희생자, 나치, 살인자 등을 모티브로 자기만의 독특한 상징 기호로 표현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살인자, 죽은 자 그리고 그의 영혼>, <나치의 사악한 미소>, <죽은 자와 나치의 사악한 미소>에서 핍박받는 자의 고통을 읽어낼 수 있다. 드브레는 1940년대를 지나며 추상의 길로 나아갔다.


20240731_144904.jpg 기호 인물, 1950, 종이에 잉크, 100×64cm
20240731_144925.jpg 기호 인물, 1950, 종이, 캔버스에 잉크, 각 120×81cm



첫 번째 전시장에선 1부 ‘만남, 추상으로’라는 제목 아래 학창 시절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드브레의 초기 작품들을 선보인다. 여기에 눈여겨봐야 할 것은 드브레가 1949년에 처음으로 시도한 <기호 인물(Sign Character)> 연작이다. 인물의 형상을 간략한 필선으로 단순화, 상징화한 것인데, 전시장에 걸린 일련의 ‘기호 인물’ 작품을 보면 마치 먹으로 선을 그리고 여백을 둔 동양의 서예 작품을 보는 듯하다. 어떤 작품에서는 잉크의 농도를 묽게 해서 쓰기도 한 걸 보면 일본이나 중국의 서예와 수묵 기법에서 어떤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드브레는 먹과 제조법이 같은 인디언 잉크(Indian Ink)를 즐겨 사용했다.


20240731_150222.jpg 짙은 여름(카샹), 1966-67, 캔버스에 유채, 189×310cm
20240731_150243.jpg 봄의 황톳빛 분홍(카샹), 1976-78, 캔버스에 유채, 180×180cm



1959년에 이르면 드브레 특유의 추상 작업이 본격적으로 만개한다. 드브레는 찬란하고 투명한 효과를 표현하기 위해 물감을 묽게 해서 반복적으로 화면에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이렇게 하면 수없이 많은 붓질이 흔적이 화면에 고스란히 남는다. 주로 한 가지 색을 주조로 사용해 색면회화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실제로 드브레는 1959년 미국 전시 때 뉴욕에 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를 만났다. 드브레가 로스코의 작업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작가의 내면에서 끌어올린 색을 화면에 반복해서 얹어 색 자체로 깊이를 만들어내는 방식에서 둘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훗날 드브레는 물감을 덩어리째 화면에 얹거나 표면을 긁어내는 등 표현 방식을 다양화하면서 자기만의 추상 세계를 한층 심화시켰다.


20240731_150352.jpg 양지바른 초원, 1966, 캔버스에 유채, 100×100cm
20240731_150413.jpg 거대한 엷은 검정, 1962 추정, 캔버스에 유채, 185×191cm



두 번째 전시공간에선 ‘심상 풍경의 구축’이란 제목 아래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화가의 전성기라 부를 수 있는 시기의 작품 세계를 망라해 보여준다. 이 전시의 미덕은 작품 수를 줄이는 대신 화가의 작품 세계를 시기별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도록 밀도를 높인 것이다. 사실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어떤 화가의 예술 세계를 전시되는 작품만으로 보여주기란 여간해선 쉬운 일이 아니다.


20240731_150742.jpg 루아르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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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다행인 것은 드브레의 추상 회화가 관람객을 그림에서 멀리 밀어내지 않는다는 점이겠다. 드브레는 “나는 풍경이 아니라 풍경 앞에 서 있는 내 안의 감정을 그린다.”라고 했다. 그렇게 마음이라는 필터를 통해 색채로 구체화한 드브레의 작품은 관람객들에게 그 자체로 편안하게 다가온다. 올리비에 드브레가 한스 하르퉁, 피에르 술라주와 함께 프랑스 추상회화의 거장으로 꼽힌다는 따위의 사실을 몰라도 그림을 감상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2부 전시장의 하이라이트는 각각 가로 3m에 이르는 <루아르> 연작 석 점을 벽에 걸지 않고 공중에 매달아 보여주는 ‘루아르의 방’이다.


20240731_151456.jpg 폭포 2 (레르달, 노르웨이), 1979, 캔버스에 유채, 100×100cm
20240731_151628.jpg 길고 푸른 선들 (스바뇌위, 노르웨이), 1974, 캔버스에 유채, 130×195cm



2층 전시장에선 3부 ‘여행의 프리즘’이란 제목으로 화가가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그곳의 풍경과 정서를 내면화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드브레는 1966년 노르웨이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종종 노르웨이를 찾아가 그곳의 청정 자연을 화폭에 담았다. 기후에 따라 풍토에 따라 각 나라의 자연풍경이 연상시키는 색은 다르다. 드브레는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그 나라의 자연에서 받은 영감을 각기 다른 색으로 표현했다. 시간순으로 구성된 1층 전시를 돌아본 뒤 2층 전시를 보면 미술관이 왜 전시를 이렇게 구성했는지 알게 된다.


상하이에서 올리비에 드브레 1988.jpg 상하이에서 올리비에 드브레 1988


올리비에 드브레라는 이름은 일본과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알려졌다. 1970년 일본 도쿄의 니폰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연 드브레는 첫 일본 여행에서 일본 정원과 서예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 같은 해 오사카에서 열린 세계박람회 유럽관에 참여해 거대한 도자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1993년에는 일본의 유명 사찰 다이카쿠지(大覚寺) 사원을 위한 벽화 작업을 하기도 했다. 1989년 홍콩 오페라하우스 극장막 작업을 했고, 1998년에는 상하이 대극원 극장만 작업을 맡아 상하이에 오래 머물렀다.


그에 비해 한국과의 인연은 희미하기만 하다. 드브레는 생전에 한국을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1998년 주한 프랑스문화원에서 연 <올리비에 드브레: 50년의 판화> 전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전시 외에 드브레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적은 없다. 다만 국립현대미술관에 드브레의 1983년 작품 <장미빛과 오렌지빛 선>이 소장돼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번 전시는 올리비에 드브레라는 프랑스 현대 추상화가의 예술 세계를 국내에 소개하는 첫 자리다.


20240731_151825.jpg 노르웨이 스바뇌위에서 그린 스케치북



수원시와 자매결연한 프랑스의 고도(古都) 투르(Tours) 시를 대표하는 화가가 바로 올리비에 드브레다. 투르 시에 올리비에 드브레 현대창작센터(CCC OD)가 있기 때문. 미술계에 종사하는 사람조차 잘 모르는 화가의 추상미술 전시회를 여는 것은 모험이나 다름없다. 우리말 자료는커녕 영어 자료도 없어서 프랑스어 원문 자료를 어렵사리 찾아내 번역해서 읽고 준비해야 했을 미술관 관계자들의 고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게다가 큰돈을 들여 준비한 전시에 관람객이 모이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


누구나 다 알만한 유명 화가의 유명 작품을 모셔와서 전시하는 일은 쉽고 안전하다. 하지만 이미 서울에서 대대적으로 열린, 검증된 작가들의 전시회를 재방송하듯 유치하면 지역 미술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아류 신세를 죽어도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서울에서도 못 본 전시를 해야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것 아닌가. 작품이 좋고 전시가 좋으면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찾게 돼 있다. 올리비에 드브레라는 화가를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전시 정보

제목: <올리비에 드브레: 마인드스케이프>

기간: 2024년 10월 20일까지

장소: 수원시립미술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39)

문의: 031-228-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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