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76) 인천아트플랫폼 기획전 <내게 다정한 사람>
“서기 1세기 로마 제국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대(大) 플리니우스가 『박물지 Naturalis historia』 35권에서 그림의 기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고대 그리스 도시 코린토스에 부타데스라는 도공이 살았다. 그의 딸은 한 청년을 사랑했는데, 그가 곧 긴 여행을 – 아마도 전쟁터로 – 떠나게 되었다. 연인에 대한 기억이나마 붙잡고 싶었던 그녀는 어두운 방에 등불을 밝히고 벽에 비친 연인의 그림자를 따라 윤곽선을 그려둔다. 플리니우스는 청년의 그림자 윤곽선이 인류 최초의 그림이라고 설명한다. 이 이야기는 18세기 신고전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고, 이 중 조제프 브누와 쉬베의 그림이 큰 인기를 얻었다. 사랑의 영원함을 바라는 마음이 ‘그린다’는 행위 즉 예술 행위를 이끌어내었다는 플리니우스의 이야기에 많은 예술가들이 매료되었다.”
처음엔 전시를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전시 기획자가 리플렛 첫머리에 쓴 이 글을 읽고 생각을 바꿨다. 미술에 진심인 게 틀림없다. 그 진심에 내게 와 닿았다. 다른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겠나. 예술은 결국 ‘사람’의 일인 것을.
전시는 장성은의 사진 <비스콘티 길>로 시작한다. 흔히 비스콘티 거리(Rue Visconti)라 불리는 이곳은 프랑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골목길이다. 사람들이 앞뒤로 바짝 붙어서 골목을 꽉 채웠다. 모두 열아홉. 어떤 사람은 웃고, 어떤 사람은 난감하다. 현실 세계에선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이 기묘한 장면은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다른 사람에게서 떨어지고 멀어지는 데 익숙해진 현실을 뒤집어보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2006년 사진이다. 그런데도 사진은 너와 나의 거리를 생각하게 한다. 사람은 결국 ‘관계’의 존재임을 보여준다.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웃는 얼굴들이 나를 맞아준다. 변웅필의 그림이다. 그림 속 존재들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 어떤 기분인지, 화가는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감상하고 해석하는 건 전적으로 관람자의 몫이다.
얼굴 이목구비를 최소한의 선과 면과 색으로 절제해서 표현한 이유, 독일 유학길에 올라 화가로 활동하기까지 11년을 이방인으로 보낸 경험 때문이었다. 변웅필은 인물을 그릴 때 성별이나 직업, 사회적 신분 등 누군가를 구별하고 판별하고 차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들을 모두 걷어냈다. 그렇게 그 누구도 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얼굴에 웃는 표정을 담았다. 변웅필의 그림은 잃어버린 내 모습을 비추는 자화상이다.
바이러스 유행이 한창이던 2021년 12월 호리아트센터에서 열린 변웅필의 개인전 <Someone>을 취재한 이유가 다르지 않다. 결국은 어렵고 곤란한 시기일수록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였던 것. 변웅필의 그림은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화가가 바로 그 팬데믹 시기에 완성한 그림 6점을 볼 수 있다.
변웅필 맞은편에 이의재가 있다. 강화 출신인 이의재는 1978년에 그림을 시작해 청각장애인인 고 최연갑 문하에서 수어와 한국화를 배워 인천에서 40여 년을 활동한 남다른 이력을 지녔다. 이번 전시에서 화선지에 수묵으로 그린 대형 인물화 두 점을 선보인다. <엄마>는 올해 아흔다섯이 된 친구의 어머니 얼굴을 그린 작품이다. 어머니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근현대 한국 여성들의 고된 삶에 연민을 느껴왔다는 화가가 녹록지 않았을 어머니들의 삶을 수묵 고유의 색을 담아 붓으로 섬세하게 기록했다.
다른 작품 <장손>은 집안의 장손인 올해 아흔다섯의 사촌 형을 그린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장손으로 집안 제사와 대소사를 도맡았을 사촌 형의 얼굴을 굳게 다문 입술과 또렷한 눈빛이 강조된 모습으로 그렸다. 화가는 어린 시절 두루마기에 갓 쓰고 제사 지내던 엄숙한 모습의 사촌 형을 떠올리며 그 삶의 흔적을 작품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두 작품 모두 올해 완성한 신작으로 세로 190cm, 가로 227cm에 이르는 대작이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머리카락 한 올, 주름 하나까지 화가의 붓질에 정성이 가득하다.
이의재 등 뒤에 정고요나가 있다. 에메랄드빛 바다에서 스노클링을 즐기고, 미술 전시장에서 우아하게 작품을 감상하고, 생일을 맞아 케이크 촛불을 끄고, 어느 휴일 아침의 꿀맛같은 휴식을 즐기는 모습까지. 가만, 어디선가 많이 본 장면들이다. 작가는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사진 이미지를 골라 자기만의 회화적 걸러내기를 거쳐 캔버스에 옮긴다. 그러니 대부분 즐겁고 행복한 일상이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라는 책 제목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게 전부인가. 전시 기획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오히려 작가는 반어적으로 묻고 있다. 일종의 진열장이 되어버린 소셜미디어의 기능에 대해, 끊임없이 자신을 과시할 뿐만 아니라 또 끊임없이 타인을 훔쳐보는, 그러면서 서로를 평가하고 평가당하는 현대인의 이중성에 대해서 말이다.”
2층 전시장에선 윤석남의 <벗들의 초상> 연작 회화 8점을 비롯해 백령도 출신 작가 박충의의 회화와 조각, 김태동이 인천 연수구 고려인 밀집 지역인 함박마을을 배경으로 촬영한 사진, 인공지능으로 관객와 대화하고 표정으로 소통하는 노진아의 로봇 작품 등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전시의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장성은의 사진이 이채롭다. 1층 전시장 초입에 걸린 사진 <비스콘티 길>의 바로 그 작가다.
장성은의 사진은 철저하게 연출된 장면을 보여준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 상상하게 만드는 수수께끼 같은 장면들이다. 전시 기획자의 글을 읽어보자. “인물과 사물의 예기치 않은 뜻밖의 조합, 비논리적이면서도 비(초)현실적인 시공간 구성, 수수께끼 같은 인물의 동작과 상황들은 보는 이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일상적 익숙함과 부자연스런 어색함이, 안정적 균형감과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가벼운 유머와 짙은 고독이 공존하는 이 상황들에 관람객은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매혹된다.”
전시 리플렛에 실린 기획자들의 글에서도 진정성이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