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77) 천경자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언덕에 갈대가 지천이다. 하늘은 찌푸렸고, 인적은 간데없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들판 한가운데서 갈대는 모로 누웠다. 바람에 흔들리는 줄기와 잎사귀들이 서로 몸을 비벼 스산한 소리를 낸다. 바람의 소리다. 에밀리 브론테라는 무명의 영국 작가가 생전에 엘리스 벨이란 필명으로 출간한 첫 소설이자 마지막 소설이기도 한 『폭풍의 언덕』의 배경이 된 영국 웨스트요크셔주 브래드포드 자치구에 있는 작은 마을 호워스(Haworth)의 바람 속에서 천경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림에서 바람 소리가 들린다.
이 그림이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시립미술관이 새롭게 선보이는 상설전 포스터와 소책자의 표지를 장식했다. 전시 제목인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는 천경자가 1986년에 낸 수필집의 제목이다. 누구 솜씨인지는 몰라도 제목과 그림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천경자는 제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세계 각지를 떠돌았다.
전시된 작품 30점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천경자의 1960년대 작품이다. 훗날 등장하게 될 천경자 표 인물화와 나란히 놓고 보면, 과연 같은 화가의 그림이 맞나 싶을 정도. 1960년대에 화가는 설화적, 영적, 초현실적 세계를 집요하게 탐구하면서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파랑을 전혀 다른 맥락으로 사용했다. 천경자의 파랑은 밤의 색채이며, 죽음의 색채다. 당시 천경자는 사십 대 초반이었다. 그림에 그때의 심사가 담겼으리라. 1965년 작 <초혼>, 1968년 작 <자살의 미>도 같은 맥락이다. 이 시기 작품은 영혼, 죽음, 구원 등과 닿아 있다.
“수틀 앞에 하늘빛, 보랏빛 옷을 입은 세 여인이 앉아 있고 머리에는 면사포를 쓰고 있다. 여인들 앞에는 흰나비와 꽃무리가 있고 수틀 아래 붕어들이 맴돌고 있는 형상이다. 1960년대 초중반은 천경자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작품 속 여인들은 한결같이 면사포를 쓰고 있다. 면사포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신부에 대한 환상과 동시에 욕구불만의 표출이기도 했다. 평면적이고 간결한 형태 해석, 자유롭고 활발한 붓의 율동감, 힘찬 선의 흐름이 화폭을 지배하고 있다. 천경자는 당시 한국화단에서 유행했던 추상미술의 개념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필묵에 의한 선의 개념과 색채를 결합하고 사실적인 형태를 구현했으며 환상적인 화면을 연출함으로써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했다.”
미술관이 제공하는 작품 해설이 영 못마땅하다. 더 면밀한 해석이 필요하다.
제작 연도가 확인되지 않은 <꽃무리 속의 여인>은 문예출판사가 2023년 5월에 김소월 시와 천경자의 그림을 묶어 펴낸 시그림집 『진달래꽃』의 표지로 쓰였다. 1960년대에 이미 싹을 틔운 천경자의 여성 인물화는 선 몇 가닥만으로도 인물의 개성을 드러내는 화가의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요즈음 나의 작품 주제에는 ‘꽃’이 많고 ‘여인’이 많다.
“꽃과 여인을 즐겨 그리는 그......”라고 칭찬(?)받을 시절이 올 것인지 모르지만, 그때가 오면 나는 그야말로 에덴동산에서 이브를 홀려 인간으로서의 슬픔과 기쁨, 고뇌를 맛보게 했다는 청조의 요술사, 요기로운 광채와 지성의 뱀님을 한 번 더 그려볼까 한다.
- 천경자 『캔맥주 한 잔의 유희』 (문화서적,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