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03) 존 배 <운명의 조우>
바야흐로 소풍의 계절이다. 경복궁 주변은 관광버스가 점령했고, 거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며칠 안 남은 전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점심시간을 이용해 존 배의 개인전이 열리는 갤러리현대를 찾았다. 평일인데도 관람객이 적지 않다. 바야흐로 나들이의 계절이다. 가을, 가을이다.
존 배(John Pai)는 1937년 한국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다 12살에 미국에 이민 가 지금까지 미국에서 활동해온 조각가다. 일찍이 저 유명한 뉴욕의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 디자인 학부에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당시 순수미술 전공 과정이 없었던 학교는 존 배를 위해 순수미술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965년 대학원을 졸업한 존 배는 스물여덟 나이에 모교 역사상 최연소 교수가 됐고, 2000년 학교를 떠나기까지 35년 동안 후학을 길렀다. 실로 만만치 않은 경력의 소유자다.
존 배는 철을 이용한 용접 조각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가로 평가된다. 가늘고 짧은 철사를 무수하게 용접해 선과 면의 유기적인 형태를 만들어낸다. 외형적으로는 자연물이나 인공물이 어떤 힘으로 인해 왜곡되거나 변형되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코리안-아메리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작가답게 자신의 뿌리와도 같은 동양적 정서에 서구의 추상미술이 어우러진 작업을 통해 전체와 부분, 안과 밖 등 상반된 정서를 폭넓게 아우르고 융합하는 예술관을 견지해 왔다.
1층과 지하 전시장에서는 1960년대 초기작부터 1990년대까지의 작품을, 2층 전시장에선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올해까지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처음 소개하는 <Heaven and Earth> 연작은 바닥에서부터 짧은 철선을 지그재그로 쌓아 올려 마치 용오름을 보는 듯한 리듬감과 생명력을 보여준다. 특유의 노동집약적인 작품 못지않게 견고하기 이를 데 없는 드로잉을 보면, 존 배라는 작가의 만만치 않은 내공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