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09) 간송미술관 소장 정명공주 글씨
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는 선조와 인목왕후의 맏딸이다. 자식 복이 많았던 선조의 21번째 자식이자 10번째 딸이었지만, 정실부인에게서 난 유일한 딸이었던 데다 선조가 52세에 얻은 늦둥이라 유달리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복오빠 광해군이 즉위한 뒤 외할아버지 김제남과 동생 영창대군이 역모죄로 처형되고, 어머니 인목왕후가 서궁(西宮), 즉 현재의 덕수궁에 유폐되면서 함께 감금됐다. 뒤에 공주의 지위를 잃고 서인(庶人)이 됐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화정(華政)’은 정명공주가 서궁에 머물던 시절에 쓴 것이다. ‘빛나는 정치’라는 뜻이다. 한 글자의 크기가 71~75cm에 이르는 보기 드문 큰 글씨로, 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이전 시기를 통틀어 여성이 쓴 글씨로는 전례 없는 대작이다. 정명공주는 조선 중기의 명필 한호의 석봉체를 익혀 일가를 이뤘다. 특히 ‘화정(華政)’은 조선 후기에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숙종 때 재상을 지낸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발문에서 글씨의 내력이 확인된다.
“옛날 우리 인목왕후가 서궁에 있을 적에 정명공주가 아직 혼인하지 않아 곁에서 모셨다. 슬프고 분하며 두렵고 조심하는 가운데 할 일이 없었으므로 붓을 잡고 글씨를 써서 큰 글자와 작은 글자를 썼으니, 무릇 인목왕후의 마음을 위로하고 풀어드리기 위함이었다. 계해년(1623년) 봄 어둡던 나라가 다시 밝아지자, 비로소 높은 가문으로 시집을 갔는데, 문필은 부인의 일이 아니라고 여겨 안부를 전하는 글도 모두 한글을 사용했고, 조보(朝報)와 이문(吏文)도 보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공주가 문장을 잘하는 줄 세상이 몰랐고, 죽은 뒤에 남긴 필적 또한 드물었다.
막내아들인 홍만회(洪萬恢)가 모친이 서궁에 있을 때 쓴 ‘화정(華政)’ 두 대자(大字)를 내게 보여 주며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돌아가신 어머니의 필적입니다. 어머니께서 평소 겸손해하신 뜻으로 말한다면 본래 남에게 보일 필요가 없겠지만, 자손으로서 오늘날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한다면 또한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모각하여 탁본해서 여러 자손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합니다. ...’라고 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정명공주는 공주로 복권돼 어머니 인목왕후와 함께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인조와 효종 때는 정치적 위기도 맞았지만, 이후 현종과 숙종 대에 왕실의 어른으로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숙종은 정명공주의 ‘화정(華政)’를 보고 친히 시를 지었다.
大書最難, 惟主能之. 큰 글씨는 가장 어려우니, 오직 공주만이 쓸 수 있으리.
弱年筆法, 雄健若玆. 어린 나이의 필법이 이같이 웅건하구나.
摹刊則久, 予獨晩知. 베껴 새긴 지 오래됐건만, 나 홀로 늦게 알았네.
一展一覽, 且驚且奇. 한 번 펴 보니, 놀랍고도 기이하다.
숙종과 마찬가지로 정명공주를 왕실의 큰 어른으로 경모한 영조도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정명공주가 쓴 화정(華政) 두 글자는 세상을 떠난 재상 남구만(南九萬)이 발문을 지었다. 공주의 글씨(圖著)를 이렇게 간행하니 이후에 과연 신필(信筆)이 되었다.” 풍산 홍씨를 외가로 둔 정조는 외가에 소장된 화정(華政)을 보고 발문을 썼다.
“정명공주는 부덕(婦德) 외에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 집안에 전해 오는 ‘화정(華政)’이라는 두 대자(大字)는 굳건하면서도 아름다워 작가의 품격이 있다. 규방에서 그에 짝하는 솜씨를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옛날 명가의 큰 글씨와 견주어도 그다지 뒤지지 않는다. 풍성하고 탐스러우며 삼가고 두터운 기운이 글씨 밖으로 흘러넘치니 그 덕과 성품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자손이 번성하고 부귀하며 복과 은택이 고금에 비할 바가 드문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다.”
무려 세 임금으로부터 찬사를 받은 글씨가 어디 또 있겠는가.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