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40) 특별전 <푸른 세상을 빚다, 고려 상형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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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황해도 개성 부근에 원숭이 삼형제가 살았단다. 어릴 적에 부모님을 일찍 여읜 탓에 맏이가 늘 이런저런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지. 냇가에 가서 먹을 물 떠오르는 것도 힘센 맏이의 몫이었어. 하지만 크고 무거운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아오는 일은 매번 쉽지 않았단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바닥에 주저앉아서 저리도 힘겹게 항아리를 들고 있겠니. 어깨에 잔뜩 힘준 거 보이지? 이빨이 다 드러날 정도로 힘을 헤 벌리고 있잖니. 누가 옆에서 거들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삼형제는 늘 배가 고팠지. 온 산을 헤매고 다니며 먹을거리를 구해 오는 건 둘째 녀석의 몫이었어. 험하고 가파른 산을 오르내리던 둘째가 운 좋게 크고 탐스럽게 잘 익은 석류를 찾아냈단다. 그런데 아뿔싸. 석류가 제 덩치보다 훨씬 더 큰 거야. 이걸 집까지 어떻게 옮기지? 형보다 몸집이 작은 둘째는 그 작은 몸으로 석류를 들어 나르려 안간힘을 쏟았어. 하지만 야속하게도 꼼짝도 않는 거야. 둘째가 석류를 들어 올리는 건지, 석류가 둘째를 품에 안은 건지. 둘째가 큰 소리로 형을 불렀지. 형! 이거 나 혼자 못 들겠어. 와서 나 좀 도와줘!
그럼 우리 막내는 뭘 하고 있는지 볼까? 아직 몸집이 작은 코흘리개 막내가 제 덩치보다 큰 항아리를 짊어졌네. 어라, 가만. 저 어린 녀석이 어떻게 저리도 큰 항아리를 옮기려는 걸까. 가만히 보니 몸집은 작아도 손이 무척이나 크네. 게다가 저 표정을 보렴. 힘든 기색이 전혀 없잖니. 비록 삼형제 중에서 제일 어리지만, 두 형을 도우려는 마음이 참 기특하지 않니? 항아리에 꿀이라도 들었을까. 이렇게 삼형제는 서로 힘을 합쳐 하루하루를 당차게 살았단다.
2
전시장에 원숭이 삼형제가 나란히 놓인 모습을 보고 내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봤다. 어느 지체 높은 집안의 사랑채를 장식했을 원숭이 세 마리가 실제로 한집에서 나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전시장을 돌다가 만난 세 마리 원숭이가 내 눈에는 영락없는 형제로 보였고, 둘째가 형을 쳐다보도록 유물을 배치한 전시기획자의 ‘의도’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저리도 작은 물건 안에 풍부한 이야기를 담아낼 줄 알았던 장인(匠人)의 ‘감각’이란. 8, 900년이라는 시차를 넘어 옛사람과 내가 대화를 나누는 일. 옛 유물을 만나는 즐거움이다.
여기, 내가 지어낸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아, 힘들다. 이게 무슨 팔자란 말인가. 자그마치 수백 년 동안 무거운 짐을 머리에 지고 살아왔다. 내 뒤에 든든한 친구가 있어 그 무게를 나눠서 져 주니 망정이지, 전생에 어떤 사나운 업보를 쌓았기에 이다지도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매였단 말인가. 이래 봬도 명색이 사자다. 인간 세계에 사는 진짜 사자보다도 더 큰 권위를 지닌 존재! 그런 내가 남의 머리 받치는 베개 장식 노릇이나 하게 될 줄이야. 게다가 이놈의 주인이란 작자는 어찌나 머리가 크고 무거운지, 장 안의 소문난 대두(大頭) 중의 대두라. 날마다 찾아오는 밤이 나는 두렵다. 내가 왜 혓바닥을 내밀었냐고?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더 짜증 나는 게 뭔지 알아? 아니 글쎄 나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다른 녀석이 있는데, 그치와 내 처지가 달라도 너~어무 다르다는 거야. 이 녀석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라도 일찌감치 미국이라는 크고 넓은 나라로 입양됐다가 이번 전시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처음으로 고향 땅을 다시 밟았지. 근데 더 표정 봐봐. 힘든 기색이 없잖아. 아니, 거기서 한술 더 떠서 입을 헤 벌리고 이빨을 죄다 드러내고 씩 웃고 있잖아.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위에 받치고 있는 짐이 무슨 모자처럼 잘 어울리는 건 또 뭐람. 저 녀석 주인은 소두(小頭)가 틀림없어. 그러니 저리도 싱글 벙글이지. 누군 외국물까지 먹고 신이 났는데, 명색이 보물인 내 팔자는 대체 뭐냐고. 흑.
훌륭한 장인은 디테일에 강하다. 우아하기 이를 데 없는 곡선미가 일품인 국보 <청자 상감 모란넝쿨무늬 조롱박모양 주자>에서 내가 본 것은 손잡이 꼭대기를 열심히 기어가는 달팽이 한 마리. 청자는 기본적으로 일상에서 쓸 목적으로 만든 그릇이므로, 보기만 좋은 게 아니라 쓰기도 편해야 한다. 아시다시피 높이만 34cm가 넘는 주전자를 한 손으로 들다간 자칫 손에서 미끄러져 깨지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손잡이를 쥐면 엄지손가락이 닿는 자리에 장식물이 달려 있다. 달팽이가 손잡이를 따라 하산할 기세다.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온 <청자 죽순모양 주자>의 손잡이에도 마찬가지로 엄지손가락 지지대 역할을 하는 무언가가 있다. 지렁이 한 마리가 열심히 기어간다. 조롱박에는 달팽이가, 죽순에는 지렁이가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게다. 만약에 저 주전자에서 달팽이가, 지렁이가 없다고 생각해보라. 주전자 하나에도 동물과 식물이 어울린 자연 생태계를 베풀어놓을 줄 알았던 고려 장인의 마음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만 같다. 무릇 좋은 감상자가 되려면 디테일에 강해져야 한다.
산산이 부서져 깨진 조각을 본다. 도자기라는 것이 본디 깨지기 쉬운 성질을 지녔으니, 수백 년 세월을 견디고 흠집 하나 없이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해지는 고려의 청자를 보고 있노라면 이것이야말로 작은 기적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싶다. 경남 합천의 무학대사 유허지에서 출토된 <청자 보살상 조각>은 현재 상체와 하체 한 부분씩만 남아 전한다. 손가락을 본다. 엄지손톱까지도 정교하게 빚어놓았다. 팔뚝과 손 아래로 흘러내리는 옷 주름의 표현은 또 어떤가. 완전한 형태로 남았다면 필시 귀하게 대접받았으리라.
여러모로 웃을 일보다는 화나고 찡그릴 일이 많은 시절. 전시장에서 옛사람들이 빚은 물건을 달팽이처럼, 지렁이처럼 느리게 감상하다 보면 이 팍팍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도 언젠가는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리라는 생각에 위안을 얻게 된다. 전시장을 뒤로하고 떠나려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는 <청자 나한상 조각>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래, 다 괜찮아, 힘내, 웃어. 마치 내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우리 유물 가운데 이렇게 활짝 웃는 표정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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