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림박물관은 은둔(?)의 박물관입니다. 거창한 홍보나 자기 자랑이 없습니다. 매번 소리소문없이 전시회를 엽니다. 애써 찾아보지 않았다간 놓치기 일쑤죠. 그런데 안 보면 후회막급입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안 알려져서 그렇지 호림박물관은 삼성미술관 리움(호암미술관 포함), 간송미술관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사립미술관(박물관)으로 꼽힙니다. 특히 귀중한 도자 유물을 상당히 많이 소장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현재로선 나머지 두 미술관이 기획 전시를 선보이지 않고 있어서, 호림박물관 전시가 더더욱 관심을 받아 마땅한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번 전시도 모르고 그냥 지나갔다면 틀림없이 후회하고 말았을 겁니다. 장중보옥(掌中寶玉)이란 제목에서 보듯 이번 전시회는 손바닥에 들어갈 만한 작은 도자 소품들을 선보이는 자리입니다.
예술품의 가격에 ‘크기’는 대단히 중요한 변수입니다. 당연히 큰 작품이 더 비싸죠. 하지만 예술품의 크기가 곧 ‘가치’를 대변하는 것은 또 아닙니다. 과거의 문화유산이 갖는 값어치를 ‘가격’으로만 환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번 전시 출품작들은 모두 손바닥으로 감싸 쥘 수 있을 만큼 작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깃든 이름 모를 도공의 솜씨는 오히려 더 애틋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뽐냅니다.
도자기의 용도는 다양합니다. 물론 기본적인 쓰임새는 음식물을 담는 것이었죠. 주자(注子)에는 술을 담았고, 병(甁)에는 다양한 액체를 담아 썼습니다. 작(爵)은 술잔으로 쓰였고요. 평범한 것도 많지만, 위 사진처럼 예사롭지 않은 모습을 한 것도 제법 보입니다. 단지 실용성만을 따졌다면 조금은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모양새입니다만, 옛사람들은 저렇게 작은 그릇 하나에도 남다른 ‘멋’을 베풀 줄 알았습니다.
왼쪽부터 <백자 용장식 향꽂이>, <백자 양각 매화문 필가>(개인 소장)
이 물건들 역시 일상생활 속에서 쓰인 것들입니다. 왼쪽은 향을 피우는 데 쓰인 향꽂이인데, 손바닥보다도 작은 크기에 용 세 마리를 어찌나 섬세하게 빚어놓았는지 모릅니다. 용 머리에 보이는 작은 구멍에 향을 꽂아 썼겠죠. 오른쪽은 필세(筆架), 즉 붓을 꽂아 놓는 도구입니다. 부채 모양의 각 면에 매화 무늬가 멋들어지게 베풀어져 있죠. 작다고 절대 얕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명품입니다.
왼쪽부터 <청자 양각 모란접문 신발>, <청자 동녀형 연적>(고려 12세기)
모란꽃에 잠자리가 날아드는 모습을 새겨넣은 저 청자 신발은 누가 신었을까요. 아이가 부디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기만을 바라는 애틋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것도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건넨 귀한 선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른쪽의 연적은 여자 어린이(童女)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채롭습니다. 대개 남자 어린이를 뜻하는 동자(童子) 형태는 많지만, 여자 어린이를 형상화한 자기는 극히 드뭅니다. 다른 사례가 있는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왼쪽 사진에서 왼쪽에 나란히 자리한 동물은 원숭이입니다. 손가락 마디보다 조금 클 정도로 작은 도장 손잡이 하나도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죠. 자세며 표정이 한 마디로 예술입니다. 저 작은 물건을 빚어 구워낸 도공의 섬세하기 그지없는 손길이라니…. 오른쪽 연적의 윗면에는 날개를 활짝 편 박쥐가 들어앉아 있습니다. 박쥐를 새겨넣은 조선 백자가 그리 흔하지 않아서 더 눈길이 가더군요.
제 취향에 따라 조금 특별하게 보이는 것들만 골라서 소개해 보았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려청자와 백자 31점, 조선백자 44점, 분청사기 18점 등 90점이 넘는 작품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 작은 명품을 손에 넣고 애지중지 아꼈을 옛사람의 마음을 떠올려 봅니다. 도자 소품만을 모아서 소개하는 전시는 웬만해선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전시가 어느덧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