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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Feb 16. 2020

우리는 이순신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김탁환 《불멸의 이순신》(민음사, 2014)

인연이었고, 운명이었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죠. 잊힐 만하면 불쑥 나타나는 그 이름, 이순신. 한동안은 그럴 때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며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책 한 권이 손에 들어오더군요. 제목은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책에서 이런 구절들을 만났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인격이나 장수의 그릇, 모든 면에서 한 오라기의 비난도 가하기 어려운 명장이다.”     


조선을 지켜 국운의 쇠락을 만회한 것은 실로 조선의 넬슨, 이순신의 웅대한 지략이었다.”     


이순신은 담대하고 활달함과 동시에 정밀하고 치밀한 수학적 두뇌를 지녔다. () 조선의 안녕은 이 사람의 힘 덕분이었다.”     


이순신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수로 찬양한 문구들입니다. 누가 한 말일까? 조선 사람? 한국의 군인이나 역사학자? 아닙니다. 놀랍게도 일본인들입니다. 첫 문장은 메이지 시대(1868~1912) 일본 해군의 대표 이론가였던 사토 데쓰타로, 둘째 문장은 같은 시대의 일본 작가 세키코세이, 마지막 문장은 동시대 일본 해군을 대표하는 문필가 오가사와라 나가나리가 쓴 겁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겠습니다. 세계 최초의 이순신 전기를 쓴 사람이 일본인이라는 이 책의 설명을 저는 순진하게 그대로 믿었습니다. 틀렸습니다. 최초의 이순신 전기는 《이충무공행록》이고, 글을 쓴 이는 이순신의 조카입니다. 이순신 연구가 박종평 씨가 옮기고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낸 《난중일기》에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임신년(1572, 28) 가을, 훈련원 별과(別科) 시험에 참여했다. 말을 타고 달리다가 말이 넘어져 왼쪽 다리뼈가 부러졌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공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했는데, 공이 한쪽 발로 일어나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겨 감싸니 과거시험장에 있던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     


젊은 날의 이순신에 관한 유명한 일화입니다. 어릴 적 읽은 이순신 위인전에도 나오는 내용이고요. 이 일화를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건 《이충무공행록》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의 편역자와 출판사는 《이충무공행록》을 읽어보지 않았거나 그 존재조차 몰랐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 치명적인 사실관계의 오류에도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는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일러줍니다. 일본 작가 세키코세이는 1892년에 《조선 이순신전》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표합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참전한 일본 수군의 활동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조선 수군의 지휘관 이순신의 업적을 조명한 글입니다. 이 소책자가 중요한 건 메이지시대 일본에서 이순신 신화가 만들어지는 기폭제가 됐기 때문입니다. 단재 신채호의 《수군제일위인 이충무공전》(1908)은 그로부터 16년 뒤에야 나왔습니다. 근대 이후로 한정하면 이순신 전기를 일본인들이 먼저 썼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조선 이순신전》이 중요한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이순신을 영국의 해군 영웅 넬슨 제독과 비교한 최초의 기록이란 점입니다. 일본인들은 왜 이렇게 이순신 연구에 열을 올렸을까요.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대동아 패권을 획득하기 위해선 군사력 강화, 특히 해군력 증강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본 겁니다. 일본은 그렇게 이순신을 연구하고 본받으며 군사력을 키웠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사십 대 중반에 이른 제게 어서 《난중일기》를 펼치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이순신의 생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을 비로소 뗐습니다. 《난중일기》를 정독한 뒤로는 자연스럽게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 읽었습니다. 유성룡의 《징비록》과 정경운의 《고대일록》이 대표적입니다.     


     

드라마의 원작으로 널리 알려진 김탁환의 소설 《불멸의 이순신》으로 독서를 이어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이 소설은 이순신의 생애를 가장 사료적 진실에 가깝게 되살린 역작입니다. 이순신에 관해 쓴다는 것의 한없 무게를 자기 몫으로 짊어진 작가의 고뇌가 얼마나 컸을까. 장군님의 생애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죠. 작가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는 이순신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우리는 이순신을 제대로 기리고 있는 것일까. 매번 나 자신에게조차 이렇게 묻곤 합니다. 왜색으로 얼룩진 현충사부터 엉터리 고증의 상징인 이순신 표준 영정과 광화문 이순신 동상까지, 바로 잡아야 할 사실들은 여전히 산적해 있습니다. 현충사가 어디에 있는 절이냐고 제게 물었던, 명색이 우리나라 최고 학부를 나온 어떤 이의 물음에 망연자실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십 년 동안 이순신을 오로지 신화화하는 데만 골몰했던 대가를 치르는 기분이었습니다.     


《난중일기》가 버겁게 느껴진다면 《불멸의 이순신》을 읽어보는 것도 좋습니다. 소설은 일기가 가르쳐주지 않는 이순신의 전 생애를 지극히 사려 깊게 다루고 있으니까요. 그것도 신화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영역에서 말입니다. 인간 이순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사실과 진실에 가깝게 이해할 때, 이순신의 위대함은 비로소 그 찬란한 빛을 드러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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