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 《몽유도원도》(열림원, 2002)
2013년에 세상을 떠난 최인호 작가의 짧은 소설입니다. 저는 이 책을 아주 우연히 손에 넣었습니다. 얼마 전 잘 아는 미술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갔더니 책장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골라가라더군요. 원형 공간을 빙 두른 책장들은 마치 책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우주선처럼 보였습니다. 그 사이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제목 ‘몽유도원도’. 나중에 읽어보니 안견의 저 유명한 그림 <몽유도원도>에 관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 있는 ‘도미 설화’에서 가져왔습니다. 백제 역사상 가장 음란하다고 알려진 왕이 다스리던 시대에 한 부부에게 뜻하지 않은 끔찍한 일이 닥칩니다. 《삼국사기》 의 편찬자들이 열전에까지 기록해놓은 걸 보면, 이 백제 부부 이야기는 고려 시대에도 꽤 널리 퍼져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도미(都彌)는 백제 사람이다. 그는 비록 범속한 평민이었지만 자못 의리를 알았으며, 그의 아내도 아름답고 고왔을 뿐만 아니라 행실에 절조가 있어 당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개루왕(蓋婁王)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였다.
“무릇 부인네의 덕성으로는 비록 정조가 곧고 깨끗한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고 하지만, 만약 아무도 없는 으슥하고 어두운 곳에서 달콤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여자는 드물 거야."
도미가 대답하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제 아내 같은 이는 비록 죽더라도 변함없을 사람입니다.”
도미의 아내가 출중한 미모를 지니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희대의 난봉꾼 임금은 타오르는 욕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내가 유혹하면 틀림없이 넘어오겠지. 그래서 그 남편을 불러들입니다. 내가 유혹하면 넘어올까, 안 넘어올까? 안 넘어오고 견디겠어? 하지만 도미의 믿음은 철석같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내 아내는 절대 변심하지 않을 거라고.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죠. 왕은 도미를 시험에 들게 합니다.
왕이 시험해보고자 하여 도미에게 일을 주어 머물러 두고, 가까운 한 신하를 시켜서 거짓으로 왕의 옷과 말과 시종을 갖추어 밤에 도미의 집으로 가게 했으며, 미리 사람을 보내 왕이 온다고 알렸다. 왕으로 가장한 이가 도미의 아내를 보고 말하였다.
“내가 오랫동안 너의 아리따움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해 너를 차지하게 되었다. 내일 너를 들여 궁녀로 삼을 것인즉, 지금부터 너의 몸은 나의 것이다.”
드디어 음행하려 덤벼들자 도미의 아내가 말하였다.
“국왕께서 망령된 말을 하실 리 없으니 제가 감히 순종하지 않겠나이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에 드소서. 저는 옷을 갈아입고 나서 모시겠습니다.”
그녀는 물러 나와 여종 하나를 갖가지로 꾸며 들여보냈다.
절대 공평할 수가 없는 내기였죠. 왕은 이미 내기가 끝났다는 거짓말로 도미의 아내에게 동침을 요구합니다. 퇴로가 없는 덫이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까. 도미의 아내는 여기서 기지를 발휘합니다. 왕의 잠자리에 여종을 대신 들여보낸 겁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왕이 뒤에 속은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에게 죄를 들씌워 두 눈동자를 뽑아버리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 작은 배에 실어 강물에 띄워버린 다음, 마침내 그의 아내를 이끌어 강제로 음행하려 하였다. 그녀가 왕에게 말하였다.
“지금 저는 이미 남편을 잃고 홀홀 단신으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데다가, 하물며 왕의 사랑을 입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말씀을 어기리이까? 그러나 지금은 월경 때문에 온몸이 더러워져 있으니, 다른 날을 기다려 깨끗이 목욕한 뒤에 오고자 합니다.”
왕이 그 말을 믿고 허락하였다. 그녀는 곧바로 달아나…
분노한 임금은 도미에게 죽음을 선사하기로 합니다. 두 눈을 뽑아낸 뒤 배에 실어 강물에 띄우죠. 그러고는 도미의 아내를 불러와 동침을 강요합니다. 여기서 도미의 아내는 또 한 번 임금을 속입니다. 월경을 핑계로 시간을 번 거죠. 임금은 또 속았고, 도미의 아내는 위험천만한 도주를 감행합니다. 이제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강어귀에 이르렀으나 건널 수가 없어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자, 홀연히 배 한 척이 물결을 따라 이르는 것이었다. 그녀가 이를 잡아타고 천성도(泉城島)에 도착해 남편을 만났는데, 그는 아직 죽지 않고 풀뿌리를 캐 먹고 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이 한 배에 올라 고구려의 산산(䔉山) 아래 이르니,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옷과 먹을 것을 주었다. 그들은 종내 구차스럽게 생활하면서 나그네로 떠돌다가 일생을 마쳤다. - 《삼국사기》 권 제48 열전 제8
하늘이 도움의 손길을 냈습니다. 부부는 살아서 재회의 감격을 누리죠. 그러고는 화를 피해 백제를 떠나 고구려로 건너가 남은 생을 함께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한 나라의 지존인 임금도 어쩌지 못했던 한 여인의 절개(節槪)는 후세에 미담으로 길이길이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천년 세월이 지나 1797년,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와 《오륜행실도 五倫行實圖》에 열녀 이야기의 하나로 수록됩니다.
도미의 아내가 외모가 곱고 절개가 있었는데, 개루왕이 들으시고 도미더러 이르시기를, “여자가 얼마나 발라도 어두운 데서 교묘히 달래면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도미가 사뢰기를, “내 아내야 설마 죽어도 두 뜻 없을 것입니다.” 임금이 시험하겠다 하시고 도미는 대궐에 두시고 한 신하에게 임금의 옷을 입히시고 밤에 그 집에 가서 이르기를, “네가 곱다는 말을 듣고 도 미와 쌍륙해서 땄으니, 내일은 너를 들여 궁녀를 삼겠다.” 하고, 동침하려 하니, 그 여자가 이르기를, “임금이 거짓말 하실 리가 없으시니, 내가 어찌 듣잡지 않겠습니까? 먼저 방에 들어가시면 내가 옷 갈아입고 가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서 종을 꾸며 들이니, 임금이 나중에 기롱 당한 줄을 아시고 하도 노해서 도미를 거짓된 죄로 두 눈자위를 헐어 버리고 배에 얹어 띄워 버리고 그 아내를 데려다가 억지로 동침하려 하시니, 사뢰기를, “이제 남편은 이미 잃었고 혼잣몸을 주변할 수 없는데, 하물며 임금께 들어왔사오니, 어찌 거스리옵겠습니까마는 오늘은 피할 일이 있으니, 다른 날을 기다리옵소서.” 임금이 곧이듣고 “그리하라.” 하시므로, 도망해서 강에 가 못 건너서 하늘을 부르며 몹시 우는데, 문득 보니 배가 다다르므로 타고 천성도에 가 제 남편을 만나니 죽지 않았으므로 푸성귀 뿌리를 파 먹이고 둘이 고구려로 갔다. - 《삼강행실도 三綱行實圖》
敢曤雙眸放大河 감히 두 눈을 빼고 큰 강물에 띄워버리니
國君威柄奈如何 나라 임금의 위엄의 권세가 어찌 그와 같나.
我儀我特眞天合 나의 남편은 나에게 진정 하늘이 맺어 준 것
縱備宮人矢靡他 설령 나인으로 삼는다고 해도 그를 따르리라.
詭言逃走出重闉 거짓말을 하고 도망하여 궁궐을 빠져 나와
泣涕漣洏傍水濱 콧물 눈물을 흘리며 강물 가에 이르러 비니.
天地神明皆佑助 천지 신명(天地神明)이 모두 도우고 도와
泉城島上見良人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에서 남편 만나게 되어.
- 《오륜행실도 五倫行實圖》
조선시대에 도미의 아내가 열녀로 떠받들어진 까닭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최인호의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짧은 설화를 길게 풀어 쓴 해설서에 가깝습니다. 제게는 옛이야기의 긴 생명력을 다시금 확인한 기회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굳이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여 각색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도 들더군요. <몽유도원도>라는 제목도 어색해 보이고요. 다만 서양화가 박항률 화백의 표지 그림과 삽화는 기억에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