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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Feb 09. 2020

이순신의 전투 장면을 담은 그림①

<수책거적>(고려대학교 박물관)

북병사(北兵使)가 치계하였다.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慶興府使이경록(李慶祿)과 조산 만호(造山萬戶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21선조 20년 10월 10일 을축 두 번째 기사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을 물어 이순신을 가뒀다는 보고. 이순신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입니다. 1587년이었으니 당시 이순신의 나이 마흔셋. 당시 이순신의 직책은 조산만호(造山萬戶)였습니다. 국토의 최북단 국경지대에 있는 녹둔도(鹿屯島)라는 섬의 수비대장이었죠. 지금으로 치면 최전방 육군부대 중대장쯤 됐을 겁니다.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이 기록은 이순신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순신이란 지휘관의 존재를 국가가 처음으로 ‘인지’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입니다. 중앙정부에 이름이 알려졌다는 사실이 갖는 무게는 결코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이야 이순신을 모르는 한국인이 없지만, 당시 이순신은 이름 없는 하급 무관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렇다면 ‘패장’ 이순신에게는 어떤 처분이 내려졌을까. 정확하게 6일 뒤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등을 잡아 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 선조실록 21선조 20년 10월 16일 신미 첫 번째 기사     


잡아 올까요? 하고 물었더니 임금은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면서 곤장 몇 대 때리고 관직을 박탈한 뒤 백의종군하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이 기록 또한 이순신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임금이 녹둔도 전투를 패배로 못 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패전으로 규정했다면 이후에 이순신의 운명이 어찌 됐을까요. 게다가 5년 뒤에 조선을 불바다로 몰아넣은 참혹한 왜란을 생각하면 소름마저 돋습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는 법이라지만….     


《북관유적도첩》에 실린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에 관한 그림과 글



이순신은 조선을 구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은 혹시 남아 있는 게 없을까? 있습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蹟圖帖》이란 화첩입니다.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북관, 즉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서 용맹과 기개를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묘사한 그림 여덟 폭을 글과 함께 모아 묶은 책이죠.     


이 책에 일곱 번째로 등장하는 그림이 바로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를 묘사한 겁니다. 위에 인용한 《실록》의 기록이 보여주듯, 임금은 녹둔도 전투를 패전으로 규정하지 않았죠. 더구나 두 차례 왜란을 거치면서 이순신은 국가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공식 추앙됩니다. 그래서 그림이 그려지고 남을 수 있었던 것이죠. 정부 주도로 그림이 그려졌다는 사실은 다시 말하면 후대에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가 ‘승전’ 또는 그에 필적하는 업적으로 평가됐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수책거적(守柵拒敵), 목책을 지키며 적을 막아냈다는 뜻입니다. 그림 옆에 간략한 해설이 붙어 있습니다.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선조 정해년에 순찰사 정언신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조산만호 이순신에게 맡겼다가을이 와서 수확할 때가 되자 주변 오랑캐의 여러 족장과 내륙 깊은 곳의 물지개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추도에 군사를 숨겼다수비군이 얼마 되지 않아 약하고 농민들이 들판에 퍼져 일하자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먼저 기병으로 포위하고 목책을 따라 노략질을 했다이때 목책 안의 군사들이 모두 들에 나가고 머릿수가 얼마 되지 않아 곧 버티기 어려워졌다족장 마니응개가 참호를 뛰어넘어 목책 안으로 들어오려 하므로 목책 안에서 화살을 쏴 거꾸러뜨리니 적들이 패해 달아났다이순신이 목책을 열고 쫓아가 잡혀간 농민들을 구해 돌아왔다.”     


<수책거적> 《북관유적도첩》, 조선 17~18세기, 41.2×31cm, 종이에 엷은 채색, 고려대학교 박물관

  


그림을 볼까요. 화면 가운데로 ‘ㄴ’자 모양의 나무 울타리, 즉 목책이 둘러 있군요. 목책을 지키는 병사는 아홉. 활을 들고 목책 밖의 여진족을 겨누고 있습니다. 감상자가 활 쏘는 자세를 잘 볼 수 있도록 죄다 왼손잡이로 만들어놓은 게 재미있네요. 그 위로 멀찍이 떨어져 이 광경에 어쩔 줄 모르는 백성들이 보입니다. 울타리 밖에서는 여진족 기병들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둘은 이미 화살에 맞아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고요. 그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백성들 몇이 소와 함께 여진족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렇게 번듯한 그림이 가까이 있는데도 그 존재는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녹둔도 전투에 관한 기록은 이순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징비록 懲毖錄》에도 실려 있지만 그 내용은 대단히 소략합니다. 물론 녹둔도 전투에 관한 기록은 여러 곳에 남아 있죠.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순신의 맏형인 이희신의 아들, 그러니까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李芬, 1566~1619)이 쓴 《이충무공행록 李忠武公行錄》입니다. 전쟁이 나자 본가와 수군 진영을 오가며 이순신을 도운 분이죠. 삼촌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후 어느 시점에 조카가 삼촌의 일대기를 정리합니다. 이순신 사후에 나온 최초의 이순신 전기(傳記)입니다. 여기에 녹둔도 전투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순신이 병사를 늘려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다는 대목입니다.     


그 섬은 외롭고 멀었으며게다가 방어하고 지키는 군사 수가 적어 우려되는 곳이었다몇 차례 병사 이일에게 군사를 보충해줄 것을 요청했으나이일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급기야 여진족이 쳐들어왔기에 죽기 살기로 싸워 물리친 이순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위에서 이미 소개했죠. 그런데 조카의 기록을 보면 여기에도 사연이 있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병사는 공을 죽여 입을 막아 자신의 죄를 면하고자 공을 가두고 형벌을 가하려고 했다.     


문책을 당할까 두려웠던 북병사 이일(李鎰, 1538~1601)이 이순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일부러 잡아 가뒀다는 겁니다. 조카의 기록만 놓고 보면 이순신은 그 전투를 패배로 몰아가려는 상관의 추궁에 한 치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대목입니다.     


이일은 군대가 패배한 것에 대한 진술서를 받으려 했으나공이 거부하며 말하기를, “제가 군사의 수가 적다고 몇 번이나 군사 보충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그런데도 병사께서는 허락해주지 않으셨습니다이것이 제가 병사께 올렸던 보고서입니다조정에서 만약 이 주장을 안다면 제게는 죄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게다가 제가 힘써 싸워 적을 물리치고 적을 뒤쫓아가 우리나라 사람을 되찾아왔습니다그런데도 군대가 패배했다며 따지시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라고 말하면서몸이나 목소리를 조금도 떨지 않았다이일이 한참 동안 대꾸하지 못하다가 가두어놓게 했다.     


하마터면 이순신이 목숨을 잃을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위에서 이미 확인했듯 임금은 이순신에게 무거운 벌을 내리지 않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합니다.     


사건을 들은 임금이 말하기를, “이모는 군대를 패배케 한 경우가 아니다백의종군하게 해 공로를 세우게 하라고 했다그해 겨울공로를 세워 백의종군에서 풀려났다.     


녹둔도 전투는 이순신이 군인으로서 처음 맞은 본격적인 전투였고, 이후의 상황은 이순신에게 처음으로 닥친 생사의 중대 고비였습니다. 국토의 최북단 최전방에서 벌어진 이 일촉즉발의 상황은 소설가의 상상력이 보태져 긴박감 넘치는 장면으로 다시 태어나죠. 김탁환의 소설 《불멸의 이순신》은 바로 이 녹둔도 전투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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