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21) 저녁노을미술관 기획전 《4人墨色: 남도를 담다》
아무리 멀어도 간다. 조풍류의 그림이 걸린 곳이라면.
2025년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개최에 맞춰 전남 신안군 압해도에 있는 저녁노을미술관에서 먹(墨)과 색(色)으로 현대 한국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가는 박수경, 조용백, 조풍류, 최순녕 네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기획전을 열고 있다. 남쪽 바다 끄트머리에 있는 섬 미술관에서 여는 전시여서 찾아가기가 여간 난망하지 않은데도,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서용선, 한영섭 작가 등이 일부러 전시장을 찾은 것만 봐도 이 전시가 얼마나 주목받는지 알 수 있다. 수묵비엔날레 본 전시보다 오히려 언론 보도가 더 많이 나왔다는 사실 또한 전시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리라.
2015년 12월 갤러리 그림손 전시 《the SEOUL 더서울프로젝트》를 취재한 이후 조풍류 작가의 그림이 출품된 거의 모든 전시를 다 봤다. 게다가 서울과 자은도 작업실도 여러 차례 가봤으니, 조풍류 작가의 웬만한 그림은 거의 다 봤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조풍류 작가의 삶과 예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올해 4월 나의 첫 미술책 《풍류, 그림》(아트레이크, 2025)을 세상에 내놓았다. 아니, 그런데 이게 뭔가. 대체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전혀 몰랐던 조풍류의 그림이 한 점, 두 점 툭툭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내가 못 본 그림이 있었다고? 도판으로만 본 경우야 그렇다 치고, 아예 존재조차 몰랐던 그림이라니. 그러니 아무리 멀어도 가보는 수밖에.
저녁노을미술관 전시에 출품된 조풍류의 작품 8점 가운데 내가 처음 본 것이 바로 2008년 작 <관산마을>이다. 한창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사생하던 시절 작품의 하나로, 내장산, 월출산, 변산, 두륜산 등과 더불어 호남 5대 명산의 하나로 꼽히는 전남 장흥군 천관산에서 전남 고흥군 소록도 쪽을 바라본 풍경을 담았다.
가까운 산비탈의 소나무와 바위로부터 산 아래로 넓게 펼쳐진 너른 들판과 마을을 지나, 화면 왼쪽 위로 물결치는 세 줄기 산을 차례차례 건너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 다도해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흘러간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산의 표현법이 전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자. 모색기라 할 그 시기에 작가는 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채롭게 시도하며 조풍류 식 채색산수의 틀을 조금씩 가다듬어갔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조풍류 작가의 대표작은 <운주사>(2010)다. 조풍류 작가는 2000년대 들어 전국 각지를 사생하며 자기만의 채색산수를 부단히 모색했는데, 그렇게 몇 년에 걸쳐 자기만의 시점으로 그동안 가다듬은 채색화 기법을 작심하고 쏟아부은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이 유서 깊은 사찰을 운주사 경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천태산 높은 곳에서 넓게 조망하며 일대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오른쪽 아래 소나무 숲에서 운주사 경내를 지나 천불천탑이 놓인 골짜기 따라 시선을 옮기면 멀리 첩첩산중을 이룬 산이 병풍처럼 버티고 서서 반대편으로 운주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세로 220cm, 가로 260cm로 당시까지 조풍류 작가가 그린 가장 큰 작품이다. 왼쪽 아래 바위에서 모자를 쓴 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바로 화가 자신이다. 도판으로만 보던 그림 앞에 서니 그 에너지가 보통이 아니다. 모름지기 그림은 원작을 직접 봐야 그 진가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확인하게 해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운주사>와 더불어 <선학동의 노을>(2008), 세월호 아이들을 생각하며 그린 동거차도 앞바다의 야경을 그린 <동거차도>(2024)는 도판이 아닌 원화로는 처음 만났고, 조풍류 작가가 전남 신안군 자은도에 살면서 그린 <자은도 고장마을>(2024), 비단에 먹과 분채로 그린 <자은도 고장마을>(2024), <자은도 구영마을>(2024)는 작가의 자은도 집에서 직접 본 적이 있다. 이 그림들은 모두 내 책 《풍류, 그림》에 도판이 실려 있다. 작가가 올해 그린 <자은도 구영마을>(2025) 한 점만 이번 전시에서 처음 봤다.
함께 전시된 박수경, 조용백, 최순녕 작가의 작품도 저마다 자기만의 개성을 듬뿍 담고 있어서 전시를 보는 즐거움이 상당하다. 저녁노을미술관에서 바라보는 노을이 일품이고, 미술관 옆 분재정원은 딱 지금이 가장 산책하기 좋은 기가 막힌 명소다. 미술관 입구에 놓인 서가 맨 윗줄에 내 책 《풍류, 그림》이 놓여 있다. 미술관장님의 마음 씀씀이에 깊이 감사드린다. 원래 10월 19일(일)까지로 예정했던 전시를 수묵비엔날레가 끝나는 10월 31일(금)까지 연장했다니 이 좋은 전시를 절대 놓치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