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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풍류의 종묘 그림, 종묘제례 일무(佾舞)와 만나다

석기자미술관(238) 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 <일무>

by 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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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의 막이 오르고,


똑같은 옷을 차려입은 종묘제례 일무 전수자 이수자와 전수자 64명이 8명씩 줄을 맞춰 서서 왼손에는 약(籥), 오른손에는 적(翟)을 들었다. 종묘에서 드리는 제례(祭禮)에서 추는 일무(佾舞)가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랐다. 여덟 명이 여덟 줄을 이뤄 추는 팔일무(八佾舞)는 종묘제례에서도 볼 수 없는 가장 큰 규모. 실내 공연에서 선보이는 것도 사상 최초다.


KakaoTalk_20250409_102637849_13.jpg <종묘-영녕전>, 캔버스 천에 호분 먹 분채 석채, 91×234cm, 2024



무대의 배경에는 한국화가 조풍류의 작품 <종묘-영녕전>이 펼쳐진다. 맑은 날, 하늘을 태우듯 시뻘겋게 물들어 가는 뜨거운 노을에 잠긴 종묘를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색감이 무대 위에 가지런히 열을 맞춰선 이들이 입은 붉은 옷과 절묘하게 호응하며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일찍이 이런 종묘를 본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과감하고 파격적인 무대를 경험한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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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풍류 작가의 이 작품은 올해 4월에 출간한 내 책 《풍류, 그림》에서 도판으로 처음 소개했고, 같은 달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조풍류 개인전 《풍류, 서울을 보다》에서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했다. 2020년부터 종묘 연작을 그려온 조풍류 작가가 계절이나 날씨와 무관하게 붉은색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어떤 느낌을 주는지 시도해 본 것으로, 화가를 대표하는 색이 파랑이란 걸 생각하면 극히 이례적인 작품이다. 실제로 작품을 보면 무속(巫俗)의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서늘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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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시작은 종묘제례에서 날이 밝아올 때 제사를 주관하는 왕이나 세자가 이르기 전에 신을 맞이하는 신관례(晨祼禮)에서 연주하는 음악인 전폐희문(奠幣熙文)에 맞춰 추는 춤이다. 비단 예물을 올리는 ‘전폐’와 보태평 11곡 가운데 첫 곡인 ‘희문’을 결합해 ‘전폐희문’이라 한다. 왼손에 약(籥), 오른손에 적(翟)을 든 무용수 64명이 음악에 맞춰 아주 천천히, 그러면서도 단아하고 절도 있는 춤사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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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보태평지무.


보태평(保太平)은 종묘제례에서 영신, 전폐, 초헌 절차에 연주하는 곡이다. 보태평지악(保太平之樂)이라고도 한다. <희문>을 시작으로 열한 곡을 연주하고 춤을 춘다. 보태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목조로부터 익조, 도조, 환조가 조선 건국의 기틀을 차근차근 다진 일을 칭송하고, 그런 든든한 토대 위에 조선을 세운 태조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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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정대업지무.


정대업(定大業)은 종묘제례에서 아헌례(亞獻禮)와 종헌례(終獻禮)에 연주하는 곡이다. 정대업지악(定大業之樂)이라고도 한다. 보태평과 마찬가지로 열한 곡을 연주하고 춤을 춘다. 목조, 환조로 시작해 태조의 업적을 길게 찬양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보태평은 문(文), 정대업은 무(武)를 찬양하니, 문무를 겸비한 태조의 위업을 음악과 춤으로 기리는 것이다. 무(武)에 관한 내용인 까닭에 무용수들의 손엔 칼과 창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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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50409_102637849_15.jpg <종묘>, 캔버스에 천에 먹 호분 분채 석채 금니, 220×560cm, 2020



무대의 배경에는 조풍류 작가가 2020년에 완성한 첫 종묘 작품 <종묘>가 압도적인 위용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2022년 국가무형유산전수교육관 민속극장 풍류 무대에 오른 일무 공연에서 처음으로 무대의 배경을 이루는 작품으로 선보였다. 마치 이 공연을 위해 일부러 그렸다고 해도 좋을 만큼 푸른 빛에 잠긴 종묘의 야경이 신성함을 넘어 신비로움마저 자아낸다.


70분이 넘는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서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조풍류 작가의 종묘 그림이 종묘제례 일무 공연 무대 배경을 장식한 장면을 사진으로만 보던 나는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공연장에서, 그것도 64명이 처음으로 펼쳐 보인 팔일무의 역사적 현장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목도할 수 있었다. 조풍류 작가의 그림이 그 배경을 든든하게 받친 모습은 실로 감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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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이 내리기 전,


무대의 마지막은 조풍류 작가의 또 다른 종묘 그림 <종묘-영녕전>(2024)이 장식했다. 이 작품 역시 《풍류, 그림》에서 도판으로 처음 소개했고, 같은 달 조풍류 개인전 《풍류, 서울을 보다》에서 처음으로 공개됐다. 앞서 소개한 <종묘 정전>을 물들인 묵직하고 깊이 있는 ‘블루’와 달리 이 작품에서 보이는 하늘빛은 그보다 훨씬 더 밝고 경쾌해서 청량감마저 들게 한다. 월대 박석은 물론 지붕 선 하나하나까지 종묘라는 영적 공간이 품은 시간의 더께를 생생하게 표현한 이 작품은 2020년 작 <종묘>와 함께 종묘 연작 가운데 최대 크기를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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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50409_102637849_10.jpg <종묘-영녕전>, 캔버스 천에 호분 먹 분채 석채, 220×560cm, 2024



언어만 다를 뿐 모든 예술은 하나로 통한다. 조풍류 작가의 예술에서 미술과 음악은 한 덩어리다. 그림 안에 음악이 깃들고 있고, 음악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다. 조풍류의 종묘 그림은 그 생생한 시각적 증거다. 내가 조풍류의 예술을 누구보다도 높이 평가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다시, 그림 앞에 서야 한다. 경험을 넘어서는 감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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