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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구나! 너무나도 평범했던 이순신 전시

석기자미술관(239)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

by 김석


20251203_185801.jpg 이순신의 일기



■죽을 고비를 넘긴 이순신의 첫 백의종군


북병사(北兵使)가 치계하였다.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부사(慶興府使) 이경록(李慶綠)과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 수금(囚禁)하였습니다.”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0월 10일 을축(乙丑) 두 번째 기사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책임을 물어 이순신을 가뒀다는 보고. 이순신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 1587년이었으니 이순신의 나이 마흔셋. 당시 이순신의 직책은 조산만호(造山萬戶)였다. 동시에 국토의 최북단 국경지대에 있는 녹둔도(鹿屯島)라는 섬의 농경지인 둔전(屯田)을 관리하는 임무도 겸했다. 지금으로 치면 최전방 육군부대 중대장쯤 된다.


이 기록은 이순신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순신이란 지휘관의 존재를 국가가 처음으로 ‘인지’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 중앙정부에 이름이 알려졌다는 사실이 갖는 무게는 절대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이순신을 모르는 한국인이 있으랴마는, 당시 이순신은 이름 없는 하급 무관에 불과했으니.

그렇다면 ‘패장’ 이순신에겐 어떤 처분이 내려졌을까. 정확하게 엿새 뒤 『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경록(李慶綠)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 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0월 16일 신미(辛未) 첫 번째 기사


잡아 올까요? 하고 물었더니 임금이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면서 곤장 몇 대 때리고 관직을 박탈한 뒤 백의종군하게 하라고 지시한다. 이 기록 또한 이순신의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임금이 녹둔도 전투를 패배로 못 박지 않았기 때문. 만약 패전으로 규정했다면 이후 이순신의 운명이 어찌 됐을까. 5년 뒤 조선을 불바다로 몰아넣을 참혹한 왜란을 생각하면 소름마저 돋는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는 법이라지만.


수책거적.png 『북관유적도첩』에 실린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에 관한 그림과 글



이순신은 조선을 구한 영웅이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의 일화를 묘사한 그림이 혹시 남아 있는 게 없을까? 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蹟圖帖』이란 이름의 화첩이다.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북관, 즉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서 용맹과 기개를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묘사한 그림 여덟 폭을 글과 함께 모아서 묶은 책이다.


이 책에 일곱 번째로 등장하는 그림이 바로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를 묘사했다. 위에 인용한 『실록』의 기록이 보여주듯, 임금은 녹둔도 전투를 패전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더구나 두 차례 왜란을 거치면서 이순신은 국가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공식 추앙된다. 그래서 그림이 그려져 남을 수 있었다. 국가 주도로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후대에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가 ‘승전’ 또는 그에 필적하는 업적으로 평가됐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림의 제목은 수책거적(守柵拒敵), 목책을 지키며 적을 막아냈다는 뜻이다. 그림 옆에 간략한 해설이 붙어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선조 정해년에 순찰사 정언신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조산만호 이순신에게 맡겼다. 가을이 와서 수확할 때가 되자 주변 오랑캐의 여러 족장과 내륙 깊은 곳의 물지개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추도에 군사를 숨겼다. 수비군이 얼마 되지 않아 약하고 농민들이 들판에 퍼져 일하자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먼저 기병으로 포위하고 목책을 따라 노략질했다. 이때 목책 안의 군사들이 모두 들에 나가고 머릿수가 얼마 되지 않아 곧 버티기 어려워졌다. 족장 마니응개가 참호를 뛰어넘어 목책 안으로 들어오려 하므로 목책 안에서 화살을 쏴 거꾸러뜨리니 적들이 패해 달아났다. 이순신이 목책을 열고 쫓아가 잡혀간 농민들을 구해 돌아왔다.


수책거적(守柵拒敵), 《북관유적도첩》, 조선 17~18세기, 41.2×31cm, 종이에 엷은 채색, 고려대학교 박물관.jpg 수책거적, 『북관유적도첩』, 조선 17~18세기, 41.2×31cm, 종이에 엷은 채색, 고려대학교 박물관



이제 그림을 보자. 화면 가운데 ‘ㄴ’자 모양의 나무 울타리 ‘목책’이 둘러 있다. 목책을 지키는 병사는 아홉. 활을 들고 목책 밖의 여진족을 겨누고 있다. 감상자가 활 쏘는 자세를 잘 볼 수 있도록 죄다 왼손잡이로 그려놓은 게 흥미롭다. 그 위로 멀찍이 떨어져 이 광경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백성들이 보인다. 울타리 밖에선 여진족 기병들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 말머리를 돌렸다. 둘은 이미 화살에 맞아 땅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백성 몇이 소와 함께 여진족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모습도 보인다.


20251203_191004.jpg 류성룡, 『징비록 懲毖錄』, 1596년, 한국국학진흥원



녹둔도 전투에 관한 기록은 이순신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징비록 懲毖錄』에도 실려 있지만, 그 내용은 대단히 소략하다. 물론 녹둔도 전투에 관한 기록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이순신의 큰형인 이희신의 아들, 즉 이순신의 조카인 이분(李芬, 1566~1619)이 쓴 『이충무공행록 李忠武公行錄』이다. 전쟁이 나자 본가와 수군 진영을 오가며 이순신을 도운 분이다. 삼촌이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후 어느 시점에 조카가 삼촌의 일대기를 정리한다. 이순신 사후에 나온 최초의 이순신 전기(傳記)다. 이 기록에 녹둔도 전투에 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건 이순신이 병사를 늘려달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다는 대목.


그 섬은 외롭고 멀었으며, 게다가 방어하고 지키는 군사 수가 적어 우려되는 곳이었다. 몇 차례 병사 이일에게 군사를 보충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일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급기야 여진족이 쳐들어왔기에 죽기 살기로 싸워 물리친 이순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앞에서 소개했다. 그런데 조카의 기록을 보면 여기에도 사연이 있었다.


병사는 공을 죽여 입을 막아 자신의 죄를 면하고자 공을 가두고 형벌을 가하려고 했다.


문책을 당할까 봐 두려웠던 북병사 이일(李鎰, 1538~1601)이 이순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일부러 잡아 가뒀다는 얘기. 조카의 기록만 놓고 보면 이순신은 그 전투를 패배로 몰아가려는 상관의 추궁에 한 치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일은 군대가 패배한 것에 대한 진술서를 받으려 했으나, 공이 거부하며 말하기를, “제가 군사의 수가 적다고 몇 번이나 군사 보충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병사께서는 허락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제가 병사께 올렸던 보고서입니다. 조정에서 만약 이 주장을 안다면 제게는 죄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게다가 제가 힘써 싸워 적을 물리치고 적을 뒤쫓아가 우리나라 사람을 되찾아왔습니다. 그런데도 군대가 패배했다면 따지시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라고 말하면서, 몸이나 목소리를 조금도 떨지 않았다. 이일이 한참 동안 대꾸하지 못하다가 가두어놓게 했다.


하마터면 이순신이 목숨을 잃을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던 것. 하지만 위에서 이미 확인했듯 임금은 이순신에게 무거운 벌을 내리지 않고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한다.


사건을 들은 임금이 말하기를, “이모는 군대를 패배케 한 경우가 아니다. 백의종군하게 해 공로를 세우게 하라.”고 했다. 그해 겨울, 공로를 세워 백의종군에서 풀려났다.


녹둔도 전투는 이순신이 군인으로서 처음 맞은 본격적인 전투였고, 이후의 상황은 이순신에게 처음으로 닥친 생사의 중대 고비였다. 국토의 최북단 최전방에서 벌어진 이 일촉즉발의 상황은 소설가의 상상력이 보태져 긴박감 넘치는 장면으로 다시 태어난다. 김탁환의 소설 『불멸의 이순신』은 바로 이 녹둔도 전투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간다.


불멸의 이순신.jpg 김탁환 장편소설 『불멸의 이순신』(민음사, 2014)



■첫 백의종군 이후 이순신의 명예 회복


그렇다면 백의종군 이후는 어땠을까. 1589년 이순신은 특별사면을 받아 명예를 회복하고 충남 아산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비변사에서 군인을 특별 채용한다는 공고를 내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李山海, 1539~1609)를 비롯해 신료들이 추천인 명단을 제출한다.


비변사에게 무신(武臣)을 불차채용(不次採用)한다고 하자, 이산해는 손인갑(孫仁甲)‧성천지(成天祉)‧이순신(李舜臣)‧이명하(李明河)‧이빈(李蘋)‧신할(申硈)‧조경(趙儆)을, (중략) 정언신(鄭彦信)은 손인갑‧성천지‧이순신‧이명하‧이시언(李時言)‧한인제(韓仁濟)‧이언함(李彦諴)‧정담(鄭湛)‧김당(金鐺)을 (중략) 추천하였다.

-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1월 21일 기사(己巳) 첫 번째 기사


이순신의 이름이 두 번 보인다. 당시 영의정 이산해와 우의정 정언신이 나란히 이순신을 세 번째 추천자로 올렸다. 순번이 꽤 높다. 여기서 불차채용(不次採用)이란 조선의 특별 인사 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차채용은 말 그대로 차례나 서열에 상관없이 우수한 인재를 추천받아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이 제도는 나중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591년, 불차채용 제도를 통한 서애 류성룡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순신은 전라도 좌수사로 임명된다. 당시로선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불차애용이란 제도, 류성룡의 사람 보는 눈, 임진왜란 바로 직전이란 시점이 참으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고밖에 볼 수 없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도대체 어떻게 실추된 명예를 회복했을까. 그 이유를 보여주는 그림이 여기에 있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jpg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비단에 채색, 145.5×109.0cm, 리움미술관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장양공은 앞서 소개한 북병사 이일의 시호(諡號)다. 정토는 정벌, 토벌과 같은 말이다. 시전부호는 시전부락 오랑캐라는 뜻이다. 정리하면 ‘장양공이 시전부락 오랑캐를 토벌하는 그림’이다.


북쪽 국경지대에서 여진족이 활개를 치자 북병사 이일은 1588년 초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 마을인 시전부락을 공격한다. 당시 여진족이 모여 살던 여러 부락 가운데서도 시전은 꽤 강성한 부락으로 조선에 큰 골칫거리였다. 북병사 이일은 임금의 허락을 받아 1588년 정월, 시전부락을 포위한 채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인다. 가장 강한 부락 중 한 곳을 본보기로 쳐서 여진족의 기를 납작하게 꺾어놓은 것이다. 그림 하단 왼쪽에 그 내력을 적은 글이 있다.


공이 무자년(선조 21, 1588) 정월에 본도의 병사를 징발하고 부방(赴防)하는 수병(戍兵)을 더하여 회령부사 변언수와 온성부사 양대수를 좌‧우위장으로 삼고, 고령진 첨사 유극량과 조방장 이천을 좌‧우위의 선봉장으로 삼았다. (중략) 시전 땅의 네 부락을 포위하여 궁려(穹廬) 3백여 곳을 태워버리고 거의 500급을 참수하였다. 임금이 선전관으로 병조정랑 이대해를 파견하여 장사(將士)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수고를 위로하고 공의 아들 한 명에게 관직을 주도록 명하였다. 이 전투는 대개 공이 오랑캐를 무찔러 쌓은 공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 그 혁혁함이 마치 어제의 일과 같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제목에 보이는 장양공이란 시호가 1745년에 내려졌으니, 가장 이른 시기를 1745년으로 추정할 따름. 조부의 업적을 그림으로 남기기로 한 이는 이일의 손자인 이견(李汧)이었고, 그림을 그린 이는 당대에 활동한 전문 화가였다. 기록을 보면 여러 점을 그리게 해 종손을 비롯한 후손들이 나눠 귀하게 보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이 대체 이순신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림 하단에 좌목(座目)이라 해서 깨알 같은 글씨로 전투에 참여한 장수들의 명단을 적어 놓았다. 이 가운데 우리가 찾고 있던 바로 그 이름 석 자가 보인다.


이순신 부분.png


右火烈將 及第 李舜臣

우화열장 급제 이순신


북병사 이일의 여진족 토벌대는 왼쪽의 좌위(左衛)와 오른쪽의 우위(右衛)로 이뤄졌다. 이순신은 우위에서 우화열장이란 직책으로 참전했다. 우화열장은 ‘우측 화기 부대장’으로 풀이할 수 있다.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 무기는 개인 휴대용 화기인 승자총통(勝字銃筒)이었다. 여진족을 상대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에 붙은 급제(及第)는 관직이 박탈된 사람을 일컫는다. 이순신은 전투에 참여할 당시 백의종군하는 신분이었으므로 이렇게 적은 것이다.


이 그림은 앞서 살펴본 수책거적(守柵拒敵)과 더불어 이순신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조선시대 그림 두 점 가운데 하나다. 둘 다 여진족을 상대로 한 전투를 묘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순신의 무훈을 그린 그림은 이 두 점이 전부다. 임진왜란 전투를 묘사한 조선시대 그림은 없다.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어떤 그림이 어딘가에 꼭꼭 숨어 있을지도.


원균 부분.png


흥미로운 건 참전한 장수 가운데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이름이 보인다는 점이다. 이순신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조선의 장수 원균(元均, 1540~1597)이다. 원균 또한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우위 소속이었다. 아마 후방 지원부대장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원균은 정3품 직급의 통정대부로, 이순신과 같은 급의 장수로 참전했다.


훗날 극명하게 엇갈린 운명과 후대의 상반된 평가를 그때 두 사람은 짐작이나 했을까. 참 묘한 운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북병사가 이끈 여진족 토벌은 빛나는 승전으로 기록됐다. 『실록』에는 여진족 토벌 작전에 관한 기록은 없고, 전투가 끝난 뒤 상황만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지난봄에 북병사 이일이 시전부락을 섬멸하여 3백여 급을 참괵(斬馘)할 때, 마침 날씨가 몹시 추워 장병들의 손이 터지고 살이 찢어져 그 고초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바로 잔치를 내려 위로해야 하는데 내가 까마득히 잊어 말하지 못하고 유사(有司) 또한 감히 품(稟)하지 못하였다. 지금 5개월이 지났는데 한 잔의 술도 내리지 못하였으니, 너무도 온당치 못하다. 내 생각에는 속히 한 관원을 내려보내 잔치를 열어 그들을 위로하고 아울러 나의 뜻을 알렸으면 한다. 만약 관원을 보내는 것이 폐가 된다면 그곳 감사에게 명하여 잔치를 내리도록 하는 것이 어떠할지 비변사에 문의하라.” 하였다. 회계하기를 “감사의 일행에는 따라가는 사람이 매우 많아 그 폐단이 더욱 클 것이니 경관(京官)을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고 형조정랑 이대해(李大海)를 차송하였다.

-『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5월 20일 임인(壬寅) 두 번째 기사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니, 잔치를 열어 치하하라는 내용. 위에 소개한 그림의 발문은 이 기록을 근거로 작성됐을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바로 이 전투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재기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를 알고 나면 그림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는 이순신의 전공을 묘사한 희귀한 그림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시전부호도 3점.png 왼쪽부터 육군박물관, 경기도박물관, 리움미술관 소장



현재까지 확인된 같은 제목의 그림은 석 점.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려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본은 2010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04호로 지정됐다. 아울러 리움미술관과 경기도박물관이 각각 한 점씩 소장하고 있다. 그림에 관한 기록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이런 상상을 해봤다. 언젠가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는 뜻깊은 자리에 이 그림들이 나란히 걸리면 어떨까.


■국립중앙박물관 이순신 특별전에 건 기대


위에 적은 내용은 내가 2020년에 쓴 글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나 마침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순신 특별전을 연다니 흥분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기대가 컸던 걸까.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전시장을 둘러본 나는 적이 실망하고 말았다. 이순신의 군인 경력 초기에 가장 중요한 실전 경험이었던 녹둔도 전투를 묘사한 그림 <수책거적(守柵拒敵)>은 아예 보이지 않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백의종군해 군인으로서 명예를 회복한 시전부락 토벌 전투를 담은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는 원본이 아닌 복제본이 걸려 있었다.


20251203_190854.jpg 전시장에 걸린 육군박물관 소장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복제품
20251203_190928_1.png


국립박물관의 이순신 특별전도 아니면 대체 어디서 이런 그림을 봐야 한단 말인가. 이런 극적이고도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없이 ‘인간 이순신’을 어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충무공 탄신 480주년과 광복 80주년을 맞은 뜻깊은 해에 사상 최대 규모로 열리는 이순신 전시이니 당연히 『난중일기』도 보여줘야 하고, 임명장과 편지도 보여줘야 하고, 이순신의 칼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한자를 모르는 대중에게 아무 감동도 주지 않는 유물보다 더 요긴한 것은 회화라는 시각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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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순신 영정이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이순신의 초상화나 영정은 현재 전하는 것이 단 한 점도 없다. 전부 근대 이후에 그려진 것이다. 이번 전시의 맨 끝자락에 나란히 걸린 이순신 영정과 초상화 석 점이 비근한 사례다. 청전 이상범이 그린 이순신 영정, 월전 장우성이 그린 이순신 영정, 그리고 영국화가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이순신으로 추정되는 무인 초상화다. 특히 엘리자베스 키스의 그림은 2019년에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면서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20251203_191440.jpg 엘리자베스 키스, <전(傳) 이순신 초상화>, 20세기 전반, 통영시립박물관(송영달 기증)



●거북선 앞 무인…이순신 초상 복원 실마리 찾았다 (KBS 뉴스9 2019.7.8.)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4237848


이 그림은 재미교포 수집가 송영달 씨가 통영시립박물관에 기증한 이후 이번에 처음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순신 특별전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됐다. 이 그림의 존재를 9시 뉴스에 소개한 나도 작품을 직접 본 건 처음이다. 앞서 설명했듯 조선시대에 그려진 임진왜란 그림, 이순신 그림이 없다시피 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근대 이후에 그려진 풍부한 회화 작품을 왜 전시에 활용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백 마디 말보다 그림 한 점이 이순신의 생애와 업적을 더 쉽게, 더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데 이견이 있을 리 없다. 사료도 좋고, 실감 영상도 좋고, 다 좋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살아 숨 쉬는 이순신을 이야기하려면 근현대 회화 자료를 더 적극적으로 수집, 조사해서 활용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전시장 맨 끝에 걸린 이순신 영정과 초상화는 실은 전시장 맨 처음에 걸렸으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전시 정보

제목: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

기간: 2025년 11월 28일(금)~2026년 3월 3일(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2

문의: 02-2077-9000


20251203_191406.jpg 이상범, <이순신 영정>,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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