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42) 특별전 《120년의 高‧動, 미래지성을 매혹하다》
1905년 우리나라 최고의 근대 고등교육기관 보성전문학교로 출발한 고려대학교가 2025년 올해 개교 120주년을 맞았다. 120이라는 숫자의 무게만큼이나 만만치 않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 대학의 진가는 1934년에 문을 연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유물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자그마치 10만 점이 넘는 역사, 고고, 민속, 예술 자료가 박물관 수장고에 가득하다.
고려대학교가 개교 120주년을 맞아 박물관과 도서관에 보관된 국보, 보물 등 국가지정 문화유산을 포함해 귀한 소장품 120건과 학교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를 엄선해 선보이는 특별전 《120년의 高‧動, 미래지성을 매혹하다》를 열고 있다. 국내 대학 박물관 가운데 이만한 수준의 소장품을 보유한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히 역대급이다.
전시는 120주년의 의미에 맞춰 고(高), 려(麗), 대(大), 학(學), 교(敎)라는 다섯 가지 주제로 꾸며졌다. 박물관 1층과 지하 1층 기획전시실, 3층 현대미술실, 4층 인촌갤러리까지 활용한 역대 최대 규모다. 대학 박물관 전시가 뭐 그리 대단하겠냐고 지레 얕봐선 안 된다. 전시장을 돌다 보면 눈이 휘둥그레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경험을 하게 될 테니.
하늘을 우러러 별의 운행을 살피고, 땅을 굽어 지리를 살피던 옛사람들은 자연 속 질서를 인간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 별의 고도와 지형, 그리고 시간의 흐름에 대한 탐구는 인간이 우주의 질서 속에서 자기 위치를 찾기 위해 던진 첫 질문이었다. 천체의 운행을 재현하며 시간을 측정하는 <혼천시계>, 지구의 동서남북과 하늘의 별자리를 그린 <지구전후황도남북항성합도> 등은 우리가 서 있는 자리의 좌표를 찾고자 모색했던 노력의 결실이었다.
1만 원짜리 지폐 뒷면 그림을 기억하는가. 그렇다. 1만 원 지폐 뒷면을 장식한 조선 천문과학의 상징적 유물 ‘혼천의(渾天儀)’가 그 주인공이다. 1669년(현종 10) 관상감 천문학겸교수 송이영(宋以潁. ?~?)이 만든 천문시계는 창덕궁 홍문관에 설치돼 시간 측정과 천문학 교습에 사용됐다. 추 두 개의 움직임을 동력으로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시계 장치와 지구의가 설치된 혼천의, 두 부분이 연결돼 작동하며 시간과 천체의 위치를 동시에 알려준다.
<혼천의 및 혼천시계>는 조선의 전통적인 혼천의에 서양식 기계 시계인 자명종의 작동 원리를 결합한 것으로, 세계 시계 제작 역사에서 독창성과 정밀한 기술력을 보여주는 과학 기구로 평가된다. 역사적, 과학적 가치가 커 1985년 국보로 지정됐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자랑거리 중 하나로 조선시대 회화 가운데 김홍도의 그림을 절대 빼놓아선 안 된다. 조선을 대표하는 위대한 화가의 한 사람인 단원 김홍도의 그림 <송하선인취생도>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절로 나왔다. 세로 길이가 1m를 넘는 작지 않은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소나무 줄기를 중심으로 상단의 소나무 가지와 잎, 하단의 인물이 유기적으로 호응하고, 솔잎에 매달려 늘어진 듯 써 내려간 글씨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명작이다. 역시 김홍도답다. 글귀의 내용은 이렇다.
筠管參差排鳳翅 길고 짧은 대나무 통 봉황이 날개를 편 것인가.
月堂凄切勝龍吟 달빛 들어찬 마루에 생황 소리는 용의 울음보다 더욱 처절하네.
그림을 직접 대면하는 즐거움은 세부를 관찰하는 데서 단연 극대화된다. 생황을 부는 이의 얼굴을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본다. 옷차림이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가늘고 고운 손이 뜻밖이다. 두 손에 쥔 악기에 가려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선 처연함이 읽힌다. 그림에 적힌 시 구절처럼 몹시도 쓸쓸하고 고적하다. 그대, 무슨 상념에 잠겨 있는가. 문득 이렇게 묻고 싶어진다. 혹 김홍도의 자화상이 아닐까도 생각해 본다.
계단을 내려가 지하 전시실에 들어서면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하다 자결 순국한 민영환(閔泳渙, 1861~1905)의 유품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민영환 서구식 군복>을 보니 생전의 민영환은 체구가 상당히 작았던 모양이다.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이 입을 만한 크기다. 하지만 그 사람됨은 더할 나위 없이 크고 넓었을 게다. 저 작은 옷에는 다 담을 수 없었던 민영환의 꿈을 생각한다.
그 아래 저 유명한 <충정공 혈죽>이 놓여 있다. 민영환의 피 묻은 옷을 보관하던 방에서 자라났다는 전설과도 같은 사연과 함께 전하는 대나무다. 이 대나무에 얽힌 사연이 1906년 《대한매일신보》에 실리면서 민영환의 충절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져 ‘혈죽’으로 불리게 됐다. 이후 화가 석연 양기훈이 제작한 판화 <혈죽도 血竹圖>가 큰 반향을 일으켰고, 혈죽과 관련한 시(詩)를 짓는 열풍이 불기도 했다. 또한, 대한구락부가 의뢰해 일본인이 경영하던 기쿠다 사진관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민영환의 부인 박수영 여사가 광목천에 싸서 다락 안에 몰래 보관하다가 해방 후에 공개했고, 1976년 민영환의 다른 유품과 함께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됐다.
혈죽을 담은 오동나무 함 뚜껑에 보이는 큰 글씨는 민충정공혈죽(閔忠正公血竹), 그 아래 중간 글씨는 ‘병오년 2월에 자라나 같은 해 9월에 시들었다’(丙午二月生 同九月枯), 왼쪽 작은 글씨는 ‘후학 풍성 조동호가 삼가 썼다’(後學 豐城 趙東虎 謹書)이다.
그 옆에 <민영환 유서(명함)>가 있다. 민영환이 순국 전에 작성한 것으로, 명함 앞뒷면에 이천만 동포형제에게 고하는 내용이 연필로 빽빽하게 적혀 있다. 소렴(小殮)할 때 옷깃 가운데서 발견됐다고 한다. 앞에서 본 <민영환 서구식 군복>과 함께 국가등록문화유산이다. 전시장에서 보이는 한자가 인쇄된 면과 영어‧한글 이름이 같이 인쇄된 면 여백에 적힌 유서 내용을 한 자도 빠짐없이 여기에 옮긴다.
嗚呼 國恥民辱 乃至於此 我人民 行 將殄滅生存競爭之中矣 夫要生者必死 期死者得生 諸公 豈不諒只 泳煥徒以一死仰報皇恩 以謝我二千萬同胞兄弟 泳煥死而不死 期助我諸君 於九泉之下 幸我同胞兄弟二千萬 倍加奮勵 堅
오호라. 나라와 국민의 치욕이 바로 여기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중에 멸망하려 하는도다. 무릇 살기를 바라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을 것이니, 여러분은 어찌 헤아리지 못하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그로써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되 죽지 아니하고 구천에서도 여러분을 기필코 돕기를 기약하니 바라건대 우리 이천만 동포 형제들은 더욱더 분발하여 힘쓰기를 더하고
乃志氣 勉其學問 結心戮力 復我自由獨立 則死子當喜笑於冥冥之中矣 嗚呼 勿小失望 訣告我大韓帝國二千萬同胞
이에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여 학문에 힘쓰고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쳐서 다시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한다면 죽은 자는 어둡고 어두운 지하에서나마 당연히 기뻐 웃으리라. 오호라. 조금도 실망하지 말기를.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영결을 고하노라.
살갗에 닿는 옷감, 손에 쥐는 그릇, 몸을 장식하는 귀고리와 비녀, 마음을 담은 한 폭의 그림, 이 모든 것에는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관의 화려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들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나를 가꾸고 사람을 마주하는 태도, 곧 ‘품격’이 그 안에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수준급의 조선시대 회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앞에서 본 김홍도를 비롯해 심사정, 최북, 장승업, 이하응 등 쟁쟁한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장에 걸렸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대나무 그림으로 일가를 이룬 조선 묵죽화의 대가 수운 유덕장의 <설죽도 雪竹圖>. 족자 형태로 꾸며진 걸 전시장에 펼쳐 걸어 놓았는데, 종이의 주름과 갈라짐이 심해 사진으로는 그림의 진가를 담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보존 처리가 시급해 보였다.
<매화병제도>는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 글과 그림을 옷감용 비단에 그려 자식들에게 준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정약용이 유배를 떠날 때, 두 아들 학연과 학유는 19살, 16살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에 합격해 입신양명하는 것이 가장 큰 명예였지만, 두 아들은 ‘죄인의 자식’이라는 인식 탓에 과거를 볼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다. 정약용은 그럴수록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벼슬길이 막힌 폐족의 자식이라도 세상에 부끄럼 없이 떳떳하게 살아가기를 바란 것이다.
그래서 1810년, 강진 유배 시절 부인이 보내준 비단 치마를 잘라 두 아들에게 교훈이 될 만한 글을 적은 첩(帖)을 만들어 보냈다. 폐지 더미에서 극적으로 발견돼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하피첩(霞帔帖)》이다. 노을 ‘하(霞)’와 치마 ‘피(帔)’를 써 노을빛 치마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피첩의 앞 장에는 “내가 탐진에 유배 중인데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 다섯 폭을 부쳤다.”고 적혀 있다.
그런가 하면 정약용은 부인 홍 씨가 보내준 치마를 사용해 유배 중 시집간 딸의 행복을 기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적어 보냈다. 이것이 바로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매화병제도>다. 두 마리 새가 한 곳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딸이 두 마리 새처럼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길 바라는 아비의 마음을 담았다. 그 내용이 참으로 애뜻하고 절절하다.
翩翩飛鳥 息我庭梅 훨훨 나는 새가 우리 집 뜰 매화나무에 와서 쉬네.
有烈其芳 惠然其來 그 나무에 짙은 향기 있어 그리도 잘 온다네.
爰止爰棲 樂爾家室 거기 머물다가 살기도 하고 너의 집안 화락하기도 하다.
華之旣榮 有賁其實 꽃이 활짝 피고 나면 열매가 가득 맺는단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敝裙六幅 歲久紅渝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爲小障 以遺女兒.
내가 강진에 가서 귀양살이한 지 몇 해 후에 부인 홍 씨가 해진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는데, 너무 오래되어 붉은색이 다 바래 버린 것이었다. 그것을 오려서 족자 네 폭을 만들어 두 자식에게 주고 또 나머지로는 작은 칸막이를 만들어 딸아이에게 주었다.
도자기 유물도 자못 볼 만한 것이 있었는데, 그중 유독 낡은 토기 하나가 내 눈길을 붙든다. 서울시 송파구의 백제고분 가락동 2호분에서 발굴된 토기다. 온통 까만 빛을 띠는 이 토기는 발굴 당시 깨진 상태였지만, 다행히 한자리에서 조각이 모두 수습된 덕분에 다시 이어 붙여 지금과 같은 어엿한 모습을 회복했다.
4세기 물건이면 장장 1천5백 년 전 유물이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는데도 지금껏 살아남아 선인들의 자취를 증언하고 있으니 대견하고 고맙다. 깨진 데 없이 말끔하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자기보다 나는 어쩐지 이런 어리숙하고 모난 옛 토기에 더 끌린다.
견문록과 지리지, 지도에는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관찰의 시선, 그리고 그 세계를 인식하고 나아가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역사서는 한 시대를 살아낸 이들의 삶과 일, 정신을 글로 전하고, 인물의 초상과 기록화는 그 시대가 무엇을 기념하고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랐는지 보여준다. 이들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자, 세계를 향해 내딛는 태도이며, 다음 세대를 향한 책임을 담은 언어이다.
자, 여기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이라 할 기념비적 대작 <동궐도>가 있다. 동궐(東闕), 즉 창덕궁과 창경궁 전경을 화첩 16책에 나눠 담은 궁궐도다. 화첩을 전부 펼쳐 연결하면 사진에 보이듯 평행사선구도로 그려진 두 궁궐의 모습이 장대하게 펼쳐진다. <동궐도>는 천(天), 지(地), 인(人) 세 벌이 제작됐고,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각각 한 벌씩 두 번이 남아 전한다.
그동안 동궐도의 존재에 대해선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지만, 실제로 이 어마어마한 대작을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건 처음이다. 스케일이면 스케일, 디테일이면 디테일, 말 그대로 입이 딱 벌어진다. 건물 하나하나는 물론이고 담장, 연못, 우물 등 각종 시설물과 시내, 구릉, 나무 등 자연을 실재하는 그대로 화폭에 옮겼다. 당대 최고의 화원들을 동원해 장장 7년에 걸쳐 완성한 조선 궁중회화의 기념비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림을 직접 대면하는 즐거움은 세부를 관찰하는 데서 단연 극대화된다. 보면 볼수록 입이 떡 벌어진다. 2백 년 전에 그려진 것이라곤 믿기 힘들 만큼 색이 생생하게 살아 있지 않은가. 최고의 화가들이 최고의 재료로 온 정성을 다해 그렸으니, 시간이 지나도 퇴색하지 않는 빛깔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이다. 어느 한구석 허술한 데가 없다. 오늘날의 화가들이 이 그림을 본다면 필시 깨닫는 것이 있으리라.
앞서 언급했듯 고려대학교 박물관은 꽤 훌륭한 조선 후기 회화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그중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 가운데 하나가 겸재 정선의 <청풍계도>다. 인왕산 기슭,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 일대를 담은 박진감 넘치는 진경산수화로, 간송미술관 소장품과 늘 비교돼 관심을 끄는 작품이다. 올해 겸재의 그림을 숱하게 봤지만, 이 작품을 내 눈으로 직접 본 건 처음이다.
그런데 전시장을 돌다가 이상하게 내 마음을 잡아끄는 그림이 한 점 있었다. 최북의 <산수도>라는 작은 그림이다. 인물 없이 가야산 홍류동 계곡의 한 단면을 화폭에 옮겨놓았다. 주변은 짙은 안개에 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뭔가 비밀스러운 사연이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수수께끼 같은 풍경. 말로 설명하기 힘든 서늘함이 마음을 쓸고 간다. 최북의 그림에선 같은 시대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선 볼 수 없는 묘한 기운이 느껴진다. 최북의 그림은 뭔가 다르다. 그것이 최북의 개성이리라.
왼쪽 아래 여백에 적은 시는 신라인 최치원의 칠언절구 한 구절이라 한다. 조선 회화에 신라 최치원의 시라. 이 또한 본 적이 없다. 시 내용은 이렇다.
却恐是非聲到耳 세상사람 다투는 소리 내 귀에 들릴까 봐
故敎流水盡籠山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모두 막았다네.
그리고 이제 내가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가장 중요한 유물 가운데 하나로 꼽는, 그토록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화첩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蹟圖帖》을 소개한다. 고려 예종 때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북관, 즉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서 용맹과 기개를 떨친 장수들의 업적을 묘사한 그림 여덟 폭을 글과 함께 모아서 묶은 책이다.
이 화첩이 중요한 건 일곱 번째로 등장하는 그림이 바로 이순신의 녹둔도 전투를 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제목은 수책거적(守柵拒敵), 목책을 지키며 적을 막아냈다는 뜻이다. 오른쪽에 제목과 함께 아래와 같은 설명이 적혀 있다.
선조 정해년에 순찰사 정언신이 녹둔도에 둔전을 설치하고 조산만호 이순신에게 맡겼다. 가을이 와서 수확할 때가 되자 주변 오랑캐의 여러 족장과 내륙 깊은 곳의 물지개 등이 무리를 불러 모아 추도에 군사를 숨겼다. 수비군이 얼마 되지 않아 약하고 농민들이 들판에 퍼져 일하자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먼저 기병으로 포위하고 목책을 따라 노략질했다. 이때 목책 안의 군사들이 모두 들에 나가고 머릿수가 얼마 되지 않아 곧 버티기 어려워졌다. 족장 마니응개가 참호를 뛰어넘어 목책 안으로 들어오려 하므로 목책 안에서 화살을 쏴 거꾸러뜨리니 적들이 패해 달아났다. 이순신이 목책을 열고 쫓아가 잡혀간 농민들을 구해 돌아왔다.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에 관한 글에서 이 작품이 없는 아쉬움을 지적한 바 있는데, 고려대학교 박물관 전시에 나와 있어서 빌리고 싶어도 못 빌린 거다. 아니면 처음부터 빌려올 생각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다. 이 화첩은 이순신의 전투를 그린 유이한 그림 가운데 하나가 실려 있기에 그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다. 이 그림이 이순신 특별전에 나왔다면 얼마나 돋보였겠는가. 거듭 아쉬움을 삼킨다.
우리 근대회화 가운데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작품이 몇 점 있다. 그만큼 회화사적 가치가 큰 작품이란 뜻이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심산 노수현의 <신록>도 그중 하나다. 작품 앞에 서면 일단 가로 3m가 넘는 스케일에 놀라고, 화폭에 베풀어진 색과 선이 어울려 빚어낸 풍경의 디테일에 놀라게 된다. 노수현의 그림 가운데 가장 큰 대작일 뿐 아니라, 노수현이란 화가의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뛰어난 작품이다. 두 눈으로 직접 봐야 그림이 품은 만만치 않은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며 살아간다. 배움은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삶 자체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세상을 이해하는 일이다. 한 단계를 다 채운 뒤에야 다음 길이 열리고, 작은 성취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마음은 배움을 더욱 깊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배움은 그저 되풀이되는 반복이 아니다. 무젖어 익힌 것을 실천하는 힘이며, 익힌 것을 토대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창조의 과정이다.
새 시대를 이끌어갈 군주로 큰 기대를 모았던 세자 효명(孝明, 1809~1830). 하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 효명세자는 8살 되던 1817년 3월 11일, 관례대로 성균관에 입학한다. 미래 군주의 입학은 당연히 기념할 만한 일이었을 터. 국가는 효명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하는 화첩을 제작한다. <왕세자입학도첩>이다.
화첩에 실린 그림은 6장. 전시장에 펼쳐놓은 그림은 입학식의 첫 절차인 왕세자의 출궁 장면이다. 말 안장에 표범 가죽에 얹힌 그 자리가 바로 효명의 자리다. 당연히 관례에 따라 세자의 모습은 그리지 않았다. 이 그림에서도 나는 다른 무엇보다 채색의 아름다움을 본다. 만들어진 지 200년이 훌쩍 넘었건만 아직도 색이 저렇게 선명할 수 있다니. 계절이 봄이란 사실을 알려주는 꽃나무의 분홍빛이 참 곱다.
전시의 마지막 파트에서는 고려대학교의 120년 역사를 돌아본다. 하여 굳이 여기서 자세하게 설명하진 않는다. 다만, 오늘의 고려대학교를 있게 한 선구자인 김성수, 이용익, 손병희의 초상을 사진으로 소개한다. 제작 연도는 물론 크기나 액자 모양도 거의 같은 거로 봐서, 6‧25 전쟁이 끝나고 학교가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온 이후에 당대의 가장 이름난 사실주의 화가들에게 의뢰해 그리게 한 것 같다. <김성수 초상>은 김인승 화백이, <이용익 초상>과 <손병희 초상>은 박득순 화백이 그렸다. 전형적인 아카데미 화풍의 초상화다.
글이 하염없이 길어지고 말았다. 이 전시, 놓치면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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