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는 클림트의 그림이 왔다

석기자미술관(244) 《클림트와 리치 오디의 기적》

by 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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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그림


1997년 2월 22일,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 피아첸차에 있는 한 미술관에서 유명 화가의 그림 한 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여인의 초상 Ritratto di signora>. 1925년 피아첸차의 귀족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주세페 리치 오디(Giuseppe Ricci Oddi, 1868~1937)가 사들여 1931년 자기 이름을 딴 미술관을 열어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했다.


1996년 당시 18살에 불과했던 미술학도 클라우디아 마가는 <여인의 초상>이 클림트의 도록에 실린 <백피쉬>라는 작품과 형태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실제로 엑스레이로 분석해 보니 덧칠된 물감층 아래에 1912년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백피쉬>가 숨어 있었다. 클림트가 원래 그림에 붓질을 가해 다른 그림으로 재탄생시켰던 것. 지금까지 확인된 클림트의 작품 가운데 유일한 ‘이중 초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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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칠된 그림


클림트는 1910년 제9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젊은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Young Lady>라는 그림을 출품한다. 당시 그림 속 여인은 큰 모자와 스카프를 했고, 매우 앳된 모습이었다. 이 그림은 훗날 <백피쉬 Backfisch (풋내기 소녀)>로 알려지는 그림의 첫 등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2년 뒤인 1912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전시된 <백피쉬>는 큰 모자를 쓰고 스카프를 두른 젊은 여인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끝내 팔리지 않은 그림을 중개상으로부터 회수한 클림트는 붓을 들어 모자와 스카프를 지우고 여인이 입은 옷과 배경을 바꿔 훗날 <여인의 초상>으로 알려지게 될 새로운 그림을 완성했다. 클림트의 방대한 작품 세계에서 유일한 ‘이중 초상화’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되찾은 그림


초상화 밑에 다른 초상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리치오디 미술관은 이 역사적인 발견을 기념하는 대규모 특별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작품 이송 준비로 한창 분주했던 1997년 2월 22일, 그림이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진다. 그리고 나흘 뒤 미술관 지붕 천장에서 낚싯줄과 함께 빈 액자가 발견된다. 범인이 수사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남긴 치밀한 ‘가짜 단서’였다.


이 도난 사건은 인터폴의 최우선 수사 대상에 오른다. 카라바조, 페르메이르의 그림과 함께 ‘세계 10대 도난 미술품’에 이름을 올리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수많은 제보와 추측 속에서도 그림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던 2019년 12월 10일, 미술관 건물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을 정리하던 정원사가 굳게 닫혀 있던 외벽의 작은 벽감 문을 열어봤더니 그 안에서 검정 쓰레기봉투가 놓여 있었다. 봉투 안에는 놀랍게도 그림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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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이 부풀어 올랐다. 검정 쓰레기봉투가 그림이 사라진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던 데다, 그림의 상태도 벽감 안에 장기간 놓여 있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다. 정황상 줄곧 다른 어딘가에 보관되다가 발견되기 직전 벽감 안으로 옮겨졌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림이 발견됐다는 사실은 곧 외신을 타고 전 세계에 긴급 타전된다. 당시 KBS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벽속에 숨겨진 그림’…伊서 도난 22년만에 클림트 작품 되찾아 (2019.12.12.)


4341524_7mX.jpg 사진출처: KBS



22년여 전 이탈리아의 한 미술관에서 도둑맞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 해당 미술관 벽 속에서 원래 그대로의 상태로 발견됐습니다.


ANSA 통신에 따르면 현지 시간으로 10일 이탈리아 북부 도시 피아첸차의 리치 오디 갤러리에서 담쟁이덩굴을 손보던 한 근로자가 외벽의 작은 문 뒤에 있던 검은 쓰레기봉투에서 그림 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근로자의 보고를 받은 갤러리 당국은 해당 작품이 1997년 2월 도난당한 오스트리아 출신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임을 확인했습니다.


해당 작품은 클림트가 1917년 그린 젊은 여인의 초상화로, 그의 말년인 1916∼1918년 사이 완성된 여러 개의 여인 초상화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도난 당시 경찰은 누군가가 천장의 채광창을 통해 낚싯줄로 그림을 끌어 올린 것으로 추정했으나 범인은 물론 작품도 찾지 못한 채 수사는 미궁에 빠졌습니다.


갤러리 관계자는 “작품 상태가 매우 훌륭하다”며 “도난당한 뒤 갤러리 전체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흔적조차 찾지 못했는데 이처럼 인적 드문 지점의 벽 속에 감춰져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고 말했습니다. 경찰은 갤러리로부터 해당 그림을 넘겨받아 전문가 감정을 의뢰하는 한편 재수사를 시작했습니다.


정밀 감식 결과, <여인의 초상>이 클림트가 그린 진품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클림트가 말년인 1916년에서 1918년 사이에 완성한 여러 여인 초상화 가운데 하나였던 것. 미술계는 이 그림의 가치를 시가 6천만 유로에서 1억 유로로 평가했다. 하지만 끝내 누가 어떤 의도로 그림을 훔쳐 갔는지, 그리고 언제 어떤 경로로 벽감 안에 감춰졌는지 등 여러 의문은 끝내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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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기적, 한국에 오다


2019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이, 실종된 지 23년 만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이 사건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리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바로 그 클림트의 작품 <여인의 초상>이 한국에 왔다. 마이아트뮤지엄이 2025년 12월 19일부터 2026년 3월 22일까지 개최하는 전시 《클림트와 리치 오디의 기적: 이탈리아 리치오디 현대미술관 컬렉션》의 대표 작품으로 선보이는 것. 이 그림이 이탈리아 밖에서 전시되는 건 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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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18_140129.jpg 구스타프 클림트, <여인의 초상>, 1916, 캔버스에 유채, 68×55cm, 리치오디 현대미술관



두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관람자를 바라보는 여인. 파란 눈동자와 왼쪽 눈 아래 파란 점, 두 볼의 진한 홍조와 귓불과 빨간 입술, 창백하게 보이는 낯빛이 은밀하고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몸을 옆으로 돌린 채 고개를 앞으로 빼 살짝 왼쪽으로 기울여 관람자를 지그시 바라보는 저 자세, 저 몸짓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림 속 여인은 과연 누굴까.


독특하게 생긴 액자는 창을 닮았다. 액자 덕분에 그림 속 여인이 꼭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만 같다. 납치됐다가 돌아온 그림이니 얼마나 소중한가. 모두 13개 파트로 구성된 이번 전시에서 클림트의 작품을 보여주는 ‘클림트의 신비’라는 이름의 공간은 열 번째 섹션이다. 여덟 번째 섹션을 돌다 보면 옆으로 긴 작은 틈 너머로 멀리 <여인의 초상>이 설핏 보인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공간 연출이다. 맞은편 벽에는 작품에 얽힌 내력이 사진과 함께 적혀 있다.


1087px-Ricci_Oddi.jpg 리치오디 현대미술관



리치오디 미술관은 700여 점에 이르는 회화와 조각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주로 이탈리아 작가들의 1830년대부터 1930년대 초 작품 위주라고 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탈리아 근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제작된 리치오디 미술관 소장품 70여 점을 만나볼 수 있다. 사실 이탈리아 근대 미술은 우리에게 아주 낯설다. 그리고 그 시기 유럽 미술은 국적을 구분하는 게 큰 의미가 없을 정도로 파리를 중심으로 유행한 다양한 사조의 영향을 받았기에 화가의 이름을 가리고 보면 딱히 이탈리아 근대 회화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게 좋다.


20251218_132952.jpg 주세페 비아시, <빨래터의 여인들>, 1940년경, 마소나이트에 유채, 50×77cm, 리치오디 현대미술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직 여성들의 인권이 보잘것없던 시절에는 가사 노동은 전적으로 여성들의 몫이었다. 그래서 마을의 공동 빨래터에서 식구들의 옷을 빠느라 여념이 없는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우리의 조선 후기 그림 가운데 빨래터를 그린 화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가 불쑥 생각났다. 김홍도 그림의 씬스틸러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빨래하는 여인들을 몰래 훔쳐보는 선비다.


20202_김홍도_풍속화첩_빨래터.jpg 김홍도의 <빨래터>



주세페 비아시(Giuseppe Biasi, 1885~1945)라는 이탈리아 화가의 그림 <빨래터의 여인들>의 ‘씬스틸러’는 제일 오른쪽에서 고개를 돌려 빨래하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여성이다. 표정을 보라.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하얀 이빨을 훤히 드러낸 채 웃고 있다. 저 순박한 여인의 함박웃음이 없었다면 동네 여자들이 빨래하는 평범한 일상을 담은 이 그림이 얼마나 밋밋했겠는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재치 있는 화가들의 대수롭지 않은 것 같은 인물 표현 하나가 그림을 얼마나 달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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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정보

제목: 《클림트와 리치 오디의 기적》

기간: 2025년 12월 19일(금)~2026년 3월 22일(일)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 518)

문의: 02-567-8878, 마이아트뮤지엄 카카오채널


20251218_133726.jpg 스테파노 브루치, <반항아들>, 1890-1895, 캔버스에 유채, 71×113cm, 리치오디 현대미술관
20251218_133923.jpg 빈첸초 카프릴레, <인물이 있는 나폴리 풍경>, 1910년경, 캔버스에 유채, 87×62cm, 리치오디 현대미술관
20251218_134248.jpg 조르지오 벨로니, <황금빛 반사>, 1907, 캔버스에 유채, 90×140cm, 리치오디 현대미술관
20251218_135202.jpg 에스네르토 자코비, <모델>, 1940년경, 판넬에 유채, 100×78cm, 리치오디 현대미술관
20251218_135331.jpg 빈첸초 이롤리, <아침 기도>, 1925년경, 캔버스에 유채, 137×105cm, 리치오디 현대미술관
20251218_141223.jpg 도메니코 모렐리, <천사들에게 섬김 받는 그리스도>, 1895, 카드보드에 수채, 38×74cm, 리치오디 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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