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45) 『할아버지의 양손』(상수리, 2023)
“이 초안은 남하하는 피란민들입니다.
후일 작품으로 제작하여 보려고 합니다.
먹지 못하고,
주야를 막론하고,
남으로…….
모든 것을 단념하고…….”
아버지께서 첫 번째 그림 뒷면에 적어 두신 글입니다.
그때 내 나이는 네 살이었고, 혜경 누나는 여섯 살이었어요.
당시 아버지는 서른일곱 살, 젊은 화가였습니다.
스케치한 날짜를 단기 4284년(1951년) 6월 2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아버지께서 피란길에 나선 지 벌써 5개월 가까이 된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전쟁 중에 목격하신 이 고통스러운 현장을 석 장이나 스케치하셨습니다.
그만큼 충격이 크셨나 봅니다.
우리 가족은 평양을 떠나 사리원으로, 다시 해주를 거쳐 개성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 이때 갑자기 폭격기가 날아왔습니다. 폭격기는 도로를 꽉 메운 피란민 대열을 향해 기관총을 쏘기 시작했어요.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왔습니다. 사람들은 포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뛰었습니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아채었어요. 등에 업힌 막내가 놀라 자지러지게 울었습니다.
경황이 없던 어머니와 누나는 길 반대 방향으로 달음질쳤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어머니와 누나와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다시는 어머니와 누나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산가족이 된 것이지요. 헤어진 장소는 사리원과 해주의 중간쯤이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큰딸인 혜경이 누나를 유난히 아끼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에 온 아버지는 고아원이란 고아원은 다 뒤지면서 발이 부르트도록 누나를 찾아다녔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몇십 년 동안, 밤이면 꿈에서 혜경이가 나타나는 바람에 놀라 깨어나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라고 아버지는 회상하셨지요. 평생을 애타게 그리워하면서, 꿈에서라도 어머니와 누나를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아버지는 예고 없이 퍼붓는 총알을 피해 겨우 한숨 돌릴 때면, 종이와 연필을 꺼내 재빨리 스케치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그만 인민군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는 피란길은 느릴 수밖에 없었지요. 아버지는 아기에게 젖을 나눠주겠다는 어느 아주머니에게 막내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내게 잠시 기다리라고 한 후 나가셨다가 인민군들에게 발각된 것이었어요.
아버지는 정신이 아뜩했습니다. 절망적인 마음으로 인민군들에게 끌려가고 있었지요. 그런데 우연히 기적처럼 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어떤 꼬마가 아주머니들 뒤를 졸졸 따라가고 있는데, 얼핏 봐도 아들 같았다고 해요. 피란 보따리를 이고 아이의 손을 잡고 걷던 아주머니 옆에서 아기를 업고 함께 가던 아주머니가 내게는 엄마처럼 보였던 거예요. 아버지는 다급히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습니다.
“대경아!”
그런데 기적이 한 번 더 우리의 손을 잡아주었다고 할까요. 아버지는 귀에 익은 아기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응애~ 응애~~!”
온통 눈구덩이로 변한 들판 어딘가에서 아기 우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울다가 지쳤는지 울음소리는 가늘었지만, 아버지는 그 아기가 막내라고 확신하셨어요. 아버지는 총을 멘 한 인민군 병사에게 다가가 애원했습니다.
“저 울음소리는 우리 막내 목소리가 분명하오. 한 번만 가까이 가서 보게 해 주시오. 내 이렇게 빌겠소. 딱 한 번만 확인하게 해 주시오.”
어느 아주머니에게 맡긴 막내의 울음소리와 똑같으니까 아기를 한 번만 보게 해달라고 아버지는 그 인민군 병사에게 결사적으로 매달렸어요. 아버지의 진심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그는 “잠깐 한 번만이오”라며 허락했습니다.
아버지는 눈밭을 가로질러 울음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아기를 보는 순간, 아버지는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말았어요. 차디찬 눈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아기가 바로 우리 막내였으니까요. 젖을 먹여야 하는 아기였기에 아버지는 동냥젖을 나눠 주겠다는 어느 아주머니에게 귀중품을 주고 막내를 맡겼다고 해요. 아기를 잘 돌봐줄 걸로 철석같이 믿었지요. 그런데 그 막내가 동냥젖 아주머니에게 맡길 때 쌌던 빨간 포대기에 그대로 싸인 채 버려졌던 거예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아버지는 막내를 포기대로 꼭 싸서 등에 업었어요. 왼손으로는 내 손을 꼭 붙들었지요. 막내에게 먹일 죽을 조금 얻어 보자기에 싸들고 아버지는 인민군을 따라갑니다. 우리는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민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피란민들도 우리 세 식구가 측은한지 멈춰서서 돌아보곤 했어요. 인민군 병사도 아기를 업은 채 네 살배기의 손을 꼭 잡고 다시 북으로 끌려가는 아버지가 가여웠나 봅니다.
그 병사는 북쪽으로 가면서도 자꾸 힐금힐금 뒤를 돌아보았어요. 그러더니, 다른 병사들이 없는 한적한 장소에서 슬그머니 아버지를 놓아주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인민군 병사가 얼마나 고마웠던지 크고 동그란 눈매와 살짝 머금은 미소까지 선명하게 그려 넣었습니다. 그렇게라도 고마움을 나타내고 싶었나 봅니다.
아버지는 두 아이를 데리고 다시 남쪽으로 발길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드디어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군을 만났습니다.
‘개성에서 15리 나와, 구사일생’이라고 아버지는 그림에 써두었습니다.
‘이제 살았구나!’
한숨 놓으신 아버지는 태극기를 힘차게 흔들며 국군을 반겼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아버지의 왼손은 네 살 꼬마의 손목을 놓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왼손에는 늘 내가 매달려 있었습니다. 오른손으로는 지팡이도 잡고 짐도 들고, 태극기도 흔들었지만, 왼손만은 내 손목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 아버지는 오로지 우리를 살려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계속 걷고, 또 걸었다고 하셨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온몸과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내게 어떤 아주머니께서 따끈한 죽 한 그릇을 내어주었습니다. 허기진 나는 허겁지겁 죽을 들이켰어요. 이런 아들의 모습에 울컥 가슴이 메어 온 아버지는 종이를 찾아 황급히 스케치를 하셨습니다. 굶주린 아들이 정신없이 죽을 먹는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요.
아버지의 등에 업혀 오던 젖먹이 동생은 끝내 부산에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젖을 얻어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시름시름 앓다가 영영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따끈한 죽을 먹는 나를 보며, 하늘나라에 간 막내가 떠올라 가슴이 더 미어졌을 것입니다. 피란길 내내 허기졌을 막내 생각에 아버지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부산의 영주동 산자락에도 종이 상자나 흙벽돌로 지은 움집들이 빽빽이 들어섰습니다. 피란민촌이었어요. 아버지도 흙벽돌로 지은 움막 하나를 얻었습니다. 나는 흙벽돌에 등을 기대고 서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종일 바다를 내려다보았어요.
아버지는 부산과 대구 근처에서 피란 생활을 하다가, 1953년 7월 휴전 직후에 서울로 올라오셨습니다. 그리고 서울 성북동의 ‘소나무가 있는 집’에 정착하셨지요. 그토록 애타게 찾던 어머니와 누나와는 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생사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모든 그림에 그리움을 담으셨습니다. 어머니와 두 딸을 향한 그리움이 아버지의 온 생애를 지배했습니다. 휴전 후, 화가로서 먹고살기 힘든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늘 고향인 평양의 정미소에 날아들던 비둘기들과 서쪽 하늘에서 불타던 고향의 노을을 그렸습니다.
내 아버지이자 내 아이들의 조부인 윤중식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왼손이 나를 살렸습니다. 할아버지의 오른손은 나의 운명을 바꾸었습니다.
‘너무나도 고단했을 할아버지의 양손’에 감사하며,
또 다른 할아버지가 된 아들이
초등학생 손자의 손을
다시금
꼬옥
잡아줍니다.
아버지는 이 아픔과 고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피란길에는 종이 한 장 변변한 게 없었지만, 아버지는 주변에 종이만 보이면 챙겨 두었다가 피란길 현장에서 황급히 스케치를 하였습니다. 그리지 않고는 숨을 쉴 수도, 살 수도 없으셨으니까요. 피란길 스케치는 전쟁의 끔찍함을 잊지 않으려는 아버지의 안간힘이었습니다. 나중에 색을 입혀 완성하겠다고 하셨지만 아버지는 끝내 이 그림들을 다시는 보지 않았습니다. 이 전쟁이 아버지의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28장의 전쟁 스케치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고향인 평양에서 가족들과 함께 피란을 떠나 황해도 사리원을 거쳐 남쪽 끝인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아버지는 전쟁의 참상을 스케치했습니다.
곳곳에서 폭탄이 터지고, 총알이 빗발쳤습니다. 사람들이 총탄에 맞아 피 흘렸고, 바로 옆에서 신음하며 죽어갔습니다. 춥고 먹을 것조차 없는 극한의 상황이었지요. 그런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연필을 잡고 순간의 장면들을 그렸습니다. 죽을 각오로 그린 장면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위하여, 2023년 2월 윤대경
아버지 윤중식 화백의 전쟁 스케치에 아들 윤대경 선생이 글을 더해 펴낸 동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이 먹먹했다. 윤중식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화실에 줄곧 보관돼 있던 전쟁 스케치 28장은 6‧25 전쟁 70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최한 전시 《낯선 전쟁》(2020.6.25.~11.8)에서 처음 소개됐다. 그리고 2년 뒤인 2020년 성북구립미술관 윤중식 10주기 기념전시회 《회향》(2022.3.30.~7.3)에서 다시 한번 선보였다.
절박함. 도저한 절박함이 낳은 그림. 피란길에 죽음을 무릅쓰고 그린 그림. 밥 대신 그린 그림. 극한의 절박함이 탄생시킨 윤중식의 전쟁 스케치. 이 그림들의 무게를 나는 쉬이 가늠하지 못한다. 그것은 차라리 기적이었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절박함을 안고 그림을 그리고, 죽는 날까지 그 그림들을 단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고이 보관한 윤중식 화백. 그리고 아버지의 그림을 기꺼이 국립현대미술관과 성북구립미술관에 나눠 기증하고 그 소중한 기억을 담은 동화책을 낸 아들 윤대경 선생.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말의 의미를 곱씹어보게 하는 이 부자의 아름다운 삶이 내게 깊은 감동을 준다. 삶은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것. 윤중식의 그림은 그걸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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