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46) 이택광 『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2008)
절판된 책 『스탕달의 이탈리아 미술 편력』(이마고, 2002)을 읽다가, 책에 언급된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을 읽어야겠기에, 서점 사이트를 검색하다가 낯익은 저자의 이름을 만났다.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아트북스, 2007)의 저자 이택광이다. 이 책이 내 책장에 남아 있다는 건 신뢰할 만한 저자라는 뜻. 그래서 요한 하위징아의 『중세의 가을』에 앞서 이택광의 책 『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아트북스, 2008)를 읽기로 했다. 이 또한 절판된 책이다.
책을 읽다가 저자가 안내하는 다른 책이 나오면 읽기를 잠시 멈추고 그 책으로 가지를 뻗어 읽는 방식으로 꽤 여러 날에 걸쳐 이 책을 아주 천천히 읽었다. 그동안은 대개 책을 일단 다 읽은 뒤에 참고할 만한 책들을 덧붙여 읽어왔지만, 이 책만은 지금까지 해온 것과 다른 방식으로 읽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시간은 걸리지만, 읽는 즐거움은 배가된다. 그렇게 2025년의 마지막 날들을 깊고도 풍요로운 독서의 시간으로 채울 수 있었다.
첫 장 <‘중세의 가을’로 떠나는 여행>에서 저자는 중세가 서서히 저물어가던 시기, 즉 요한 하위징아의 저서로 유명해진 ‘중세의 가을’을 증언하는 대표적인 그림으로 피터르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를 꼽았다. 이 그림이 중세의 봉건적 위계에 대한 반발을 담았다는 것. 본문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죽음의 승리」는 ‘죽음에 대한 승리’라는 기독교의 교리, 정확히 말하면 그 당시 지배체제였던 가톨릭 사상에 근거한 봉건적 위계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런 까닭에 브뤼헐의 그림이 곳곳에서 무자비하게 자행되었던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학살을 암시하고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적 차원을 넘어서 브뤼헐이 말하고 있는 건 전쟁 자체에 대한 회의이기도 하다. 결국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허락하지 않는다. 전쟁의 승리자는 오직 죽음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이 그림은 담고 있는 것이다. 브뤼헐이 중세의 가을을 증언하는 대표적 화가라는 건 이 때문이다.
이 그림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건 기독교적 의미가 그대로 반영돼 있는 중세가 아니다. 이제 기독교는 추상의 차원으로 전환되며, 그 추상과 조응하는 자리에 새롭게 들어서는 건 바로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휴머니즘이다.
두 번째 장 <보스가 그려낸 중세의 ‘카오스모스’>에서 저자는 중세의 몰락을 예견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그림을 여러 점 집중적으로 소개한다. 그중에서도 내가 주목한 그림은 보스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저자는 보스가 브뤼헐의 스승인 까닭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로테스크한 보스의 그림이 드러내고자 하는 건, 중세적 조화와 균형이 사라져버린 지옥도이다. 결국 이건 혼돈의 세계이며, 그의 그림이 드러내는 환상적 이미지들은 바로 이 혼돈을 다시 질서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염원의 산물이다. 보스에게 환상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를 의미했다. 그의 그림에서 괴물은 신의 질서가 실종된 뒤에 출현하는 무질서의 혼란을 상징한다.
보스에게 이런 혼란을 초래하는 당사자는 그 누구도 아닌 자신과 같은 인간이었다. 보스가 가장 중세적인 중세인일 수밖에 없는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런 까닭에 그의 그림은 중세가 가장 중세답지 못할 때를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장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라>에서도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보스의 그림을 중요하게 거론한다. 이 장에서 천국과 지옥의 중간 지대인 ‘연옥’에 관한 언급이 나오기에 단테의 『신곡』 연옥 편을 다시 읽었다. 이제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 보자.
보스가 그린 예수는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이다. 그는 여전히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해 줄 ‘메시아’다. 예수는 무기력한 게 아니라 우리가 그의 사랑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무기력하게 보일 뿐이다. 문제는 어리석은 인간이지 힘 없는 예수가 아니다. 보스의 그림이 전달하는 이런 메시지는 최후의 심판이라는 관념과 정확하게 연결될 수 있다. 보스가 말하려고 했던 건, 그러므로 예수를 따라 배우는 것이야말로 최후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예수의 이미지는 여전히 유효한 비판의 잣대였다.
네 번째 장 <‘뻔뻔스러운’ 쾌락의 세계>, 다섯 번째 장 <르네상스를 예견한 중세의 상상력>을 지나 여섯 번째 장 <여신 비너스, 여인이 되다>에서 아주 흥미로운 대목을 만났다. 브론치노의 유명한 그림 「알레고리(비너스, 큐피드, 시간과 어리석음)」이 그것이다. 저자는 먼저 국내에서 이례적으로 인기를 끈 『다른 방식으로 보기』(열화당, 2019)에서 존 버거가 펼친 주장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존 버거의 『보기의 방식』에 나오듯이, 이 그림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노골적 알레고리다. 그럴듯한 신화적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 그림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여인의 육체와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섹스의 쾌락이다. 이 그림은 티치아노의 그림들처럼 원래 귀족이나 왕가의 침실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말은 브론치노의 그림에 내장되어 있는 의미를 다소 단순화시킬 수도 있다.
이 그림을 솔직한 에로물로 보는 존 버거의 비평 또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보기 방식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벤야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존 버거의 비평 방식은 또 다른 문제점을 예비하고 있다. 이런 방식의 비평은 작품을 분해해서 탈신비화시켜 버린다. 비평은 작품의 잔해더미 위에서 홀로 깃발을 꽂고 뿌듯해하는 것이다.
신화의 주제를 담고 있는 중세 르네상스 그림들은 도덕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브론치노의 그림도 이런 중세 르네상스의 일반적 경향과 같이 표면적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는 지극히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육체적 쾌락은 허상이라는 르네상스 특유의 내러티브를 이 그림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이 내러티브는 그냥 매너리즘일 뿐이고, 앞서 말했듯이, 정작 이 그림의 쓰임새는 왕의 결혼 선물이자 침실 장식용으로, 성욕을 북돋우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이념은 언제나 쾌락 원칙에 밀려 해체되기 마련이다. 쾌락 원칙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읽어보자.
이 작품 배후의 복잡한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 지금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건 작품의 일차적인 성적 매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다른 무엇이기 이전에 우선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피렌체의 대공작이 프랑스 왕에게 보낸 선물이었다. 쿠션에 무릎을 꿇은 채 여인에게 입을 맞추는 소년은 큐피드고, 여인은 비너스다. 하지만 그녀의 자세는 두 사람의 입맞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녀의 육체 각 부분들은 그림을 보는 남자의 눈에 잘 보이도록 배치되어 있다. 즉 그림은 그것은 보는 남자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그려진 것이다. 그녀의 성적 욕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전통에서 일반적으로 여인의 몸에 음모를 그려 넣지 않는 관습 역시 동일한 목적에서이다. 음모는 성적 능력 및 욕망과 관련이 있다. 여인의 성적 욕망은 최소화되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그림을 보는 남자는 성적 욕망이 남자만의 전유물이라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여자는 오로지 남자의 성적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 그림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대목은 큐피드의 등 뒤에서 머리를 감싸 쥔 채 절규하는 존재다. 저자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크로노스가 걷어치운 장막 너머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흉측하게 생긴 노파는 ‘질투’ 또는 ‘매독’을 의미한다. 브론치노의 고국 이탈리아에서 매독은 프랑스병으로 불렸는데, 그 이유는 프랑스군이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부터 매독이 발병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흉측한 노파가 상징하는 건 육체적 쾌락의 대가로 치러야 할지도 모를 성병에 대한 경고다. 그런데 이게 재미있다.
브론치노의 「알레고리」는 이탈리아의 코시모 데 메디치 공작의 주문에 따라 제작된 것이다. 당시 코시모는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이 그림을 선물했다. 프랑수아 1세는 예술의 문외한이면서 이탈리아 예술을 잘 아는 것처럼 허풍을 떨고 있었는데, 이 그림은 이런 프랑스 왕을 비웃는 메시지를 감추고 있다. 바로 장막 뒤의 노파가 이런 의미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매독은 곧 프랑스라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상황에서, 이탈리아가 그 ‘매독부대’를 이끌고 내려온 프랑스 왕에게 선물한 그림이 하필이면 매독을 경고하는 그림이었다니! 프랑스야말로 육체적 쾌락에나 탐닉하지 말고 이탈리아처럼 예술적 심미안을 갖추도록 노력하라는 점잖은 비꼼이 이 그림 속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어쨌든 지금까지 해석한 내용을 토대로 본다면, 브론치노의 그림은 훌륭하게 ‘진리는 시간의 딸’이라는 중세적 이념을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세인에게 진리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드러날 그 무엇이었다. 최후의 심판을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중세인에게 진리란 신과 동격이었고, 예수의 재림이야말로 신학적 진리가 현실화되는 것이었다.
일곱 번째 장 <생활의 발견, 도덕의 발견>에서는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피에로 디 코시모의 「라피타이 족과 켄타우로이의 싸움」이라는 그림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이 그림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화폭에 옮긴 것이다. 따라서 이윤기 번역의 민음사 판 『변신이야기』 제2권의 해당 대목을 찾아 읽었다.
그런데 술이 원수였는지 신부의 아름다움이 원수였는지 모르지만 켄타우로스 중에서도 포악하기로 소문난 에우뤼토스가 그만 꼭지가 돌고 말았어. 술에 취한 이 자의 눈에 신부가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겠나? 그래서 그만 이성을 잃고 만 것이네. 이 에우뤼토스가 신부의 머리채를 끌고 나가려고 하는 바람에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지. 술상이 뒤집어지고 술잔이 날았으니까.
하지만 정작 저자가 주목한 건 이 그림의 다른 부분이었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건 그림의 전경에 배치되어 있는 켄타우로스 부부의 비애다. 이 비애는 관객들에게 감정이입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오비디우스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색다른 해석의 관점을 제시하는 한편, 설령 이런 이야기를 까맣게 모르는 사람들일지라도 괴물이라고만 알려진 켄타우로스 부부의 죽음에 대해 강렬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도록 만든다. 여기에서 잔혹한 중세는 종언을 맞이한다. 말하자면, 이 그림에서 중세인은 타자(other)를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코시모의 그림은 ‘야만적 괴물’로만 간주되었던 켄타우로스를 돌연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어놓는다. 이것이야말로 중세의 스펙터클로부터 질적으로 구별되는 그 무엇이다.
저자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소개한 또 다른 그림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처형」은 그림 자체로 대단히 매혹적이다. 눈부시게 흰 드레스를 입고 두 눈이 흰 천에 가려진 채 목전에 이른 죽음 앞에 놓인 가련한 운명의 여인. 이 그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여인이 왜 처형에 이르게 됐는지를 알아야 한다. 본문을 읽어보자.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열일곱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정쟁에 휘말려 억울하게 처형당한 영국의 공주다. 헨리 7세의 증손녀로서 오빠인 에드워드 6세가 죽자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프로테스탄트 지지자라는 것을 영국인들은 좋아하지 않았고, 결국 이로 인해 그녀는 가톨릭 지지자였던 메리에게 왕위를 넘겨줘야 했다. 그녀가 왕위에 머문 기간은 고작 9일. 하지만 이쯤에서 그쳤다면 굳이 들라로슈가 이런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도 해도 너무했던 영국 가톨릭교도들은 레이디 제인 그레이와 그의 남편을 런던 타워에 감금시키고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사형선고를 내려버린다. 물론 그 집행은 보류되었지만, 레이디 제인 그레이의 아버지가 유명한 와이어트 반란에 가담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보류되었던 사형이 집행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들라로슈는 이토록 애절하게 죽음을 맞이한 아리따운 제인 그레이를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순결한 모습으로 형상화해 놓았다. 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가 어떤 느낌을 받을지는 자명하다. 말 그대로 연민인 거다.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한 귀공녀의 사연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관객은 이 그림의 구성을 통해 뭔가 알 수 없는 비애를 느낄 수밖에 없다. 시녀들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망연자실해 있고, 눈이 가려진 제인 그레이는 자신의 머리가 놓일 참수대를 손으로 더듬어 찾고 있다. 그 옆에서 가톨릭 신부 복장을 한 사람이 ‘친절하게’ 그녀의 팔을 잡고 참수대 찾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이를 통해 이 그림이 말하는 건 명백하다. 가톨릭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16세기에 영국에서 발생한 무고한 죽음을 통해 들라로슈는 가톨릭의 위선을 꾸짖는 것이라고 하겠다.
여덟 번째 장 <중세의 종언 혹은 완성>, 아홉 번째 장 <성모마리아에서 풍기는 에로티시즘>을 지나 열 번째 장 <예수의 육체가 중세의 허물을 벗다>에 이르러 바로크 회화의 선구자 카라바조의 그림을 만난다. 「엠마오의 만찬」이란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이 보여주는 건 예수와 제자들의 식사 장면이다.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흥미를 끄는 건 왼쪽에 흰 모자를 쓰고 있는 인물이다. 이 사람은 제자가 아니고 요리사다. 깜짝 놀라운 제자들의 모습과 달리 그는 덤덤하게 서 있다. 자세히 얼굴을 보면, 도대체 뭐야, 하고 생뚱맞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다. 바로 이 요리사의 표정이야말로, 막달라 마리아와 도마의 행위가 전하는 것과 동일한 메시지를 암시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이해할 수는 있어도, 마땅히 기쁘게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메시지 말이다.
세속적 육체가 공동체적 육체로 바뀐 사건이 예수의 부활이다. 마리아가 사사로이 예수를 붙잡거나 만질 수 없었던 까닭이다. 바야흐로 근대 공공성의 개념이 여기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카라바조의 그림에 등장하는 요리사의 표정이야말로, 새로운 주체의 공간을 만들어낸 바로크의 뒤틀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지만 즐길 수 잇는 대상으로 예수의 부활을 보는 태도, 바로 여기에 근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바야흐로 종교의 신앙으로 인해 가능했던 결여 없는 상상의 스크린은 그 바깥에서 이 결여를 적극적으로 느끼는 카라바조의 ‘요리사’ 같은 존재의 출현 앞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이 붕괴를 슬퍼하는 가톨릭의 비애가 미학적으로 표출된 것이 다름 아닌 바로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근대 이후의 그림은 이런 비애를 넘어 종교의 자리를 그림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들의 반복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미덕은 개념 설명에 충실하다는 점과 국내 저자들이 쓴 책에서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서양 회화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좋은 책이 흔히 그렇듯, 저자가 본문에 인용한 다른 책을 읽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으로 열한 번째 장 <죽은 예수에서 타자를 발견하다>에 소개된 한스 홀바인의 그림을 소개하고자 한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상징하는 낱말이 바로 ‘타자’다.
홀바인의 예수는 우리에게 ‘죽음을 기억하라’가 아니라 ‘죽음을 사유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죽음을 사유하는 것, 바로 여기에 근대 정신의 진실성이 싹튼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든 가식과 허위를 벗어던질 수 있다. 이 죽음만이 우리 존재의 유한성과 그 유한성 너머에 있는 모종의 무한성을 느끼게 만든다. 이게 홀바인의 에수다. 예수, 너는 죽었다. 그러나 너의 죽음에서 나는 나의 유한성을 본다. 놀랍지 않은가? 바로 타자(other)의 발견이다.
#석기자미술관 #중세의가을 #보스 #렘브란트 #이택광 #아트북스 #서양 #중세 #그림 #미술 #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