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48)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숲, 2007)
‘로마 건국의 아버지’ 아이네아스(Aeneas, 그리스어로 아이네이아스). 고귀한 여신 베누스(Venus, 그리스어로 아프로디테)와 인간 앙키세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헥토르와 더불어 트로이야(Troia) 백성들에게 신처럼 존경받는 영웅이었다. 헥토르와 함께 가장 용맹한 장수였던 아이네아스는 세기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일 대 일로 맞붙어 용감하게 싸우지만, 헥토르가 그랬듯 아킬레우스보다 한 수 아래였던 탓에 어느덧 죽음의 위기에 몰린다. 이때 상황을 예의주시하던 포세이돈(라틴어로 넵투누스)가 올림포스의 신들 앞에서 아이네아스를 살려주자고 말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저자는 왜 아무 죄도 없이 단순히 남의 잘못 때문에 고통받아야 하는가? 더구나 그가 바치는 제물들은 넓은 하늘에 사는 신들을 기쁘게 해주지 않았던가! 그러니 자, 우리가 그를 죽음에서 구해줍시다! 아킬레우스가 그를 죽인다면 크로노스의 아들이 노여워할 것이오. 다르다노스의 집안이 씨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그는 죽음을 피할 운명을 타고 났으니까요.
크로노스의 아들은 다르다노스를 필멸의 인간의 딸들에게서 태어난 자신의 모든 자식들 중에서 누구보다도 사랑했지요. 프리아모스의 집안이 이미 크로노스의 아들의 미움을 샀으니, 이제는 아이네이아스의 힘과 앞으로 태어날 그의 자손들이 대대로 트로이아인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오.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이네아스의 자손들이 트로이야인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이 예언은 훗날 로마의 가장 위대한 시인 베르길리우스(Publius Vergilius Maro)의 『아이네이스』(숲, 2007)에서 신들의 신 윱피테르(그리어스로 제우스)의 입을 통해 훨씬 더 구체화한다.
이탈리아에서 큰 전쟁을 치르며 아이네아스는 거만한 부족들을 제압하고 자신의 전사들을 위해 관습을 정하고 설벽을 쌓을 것인즉, 그때까지 세 번의 여름이 라티움에서 통치하는 그를 보게 될 것이며, 그는 루툴리족을 정복한 뒤 진영에서 세 번의 겨울을 나게 되리라. 하나 이제 이울루스라는 별명을 갖게 된-일리움이 함락되기 전에 그는 일루스였다-그의 아들 아스카니우스가 자신의 통치권으로 삼십 년 동안 순환하는 달들을 채울 것이며, 라비니움으로부터 도읍을 옮겨 왕성한 정력으로 알바 롱가의 성벽을 쌓게 되리라. 이곳에서 헥토르의 종족이 꼬박 삼백 년 동안 다스리게 되리라.
그러다가 여왕이자 여사제인 일리아가 마르스에 의해 잉태하여 마침내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되리라. 그러면 자기에게 젖을 먹여준 암 늑대의 적갈색 모피를 자랑스레 입고 다니는 로물루스가 가계를 이어 마보르스의 성벽을 쌓고 백성들을 제 이름에서 따와 로마인들이라 부르게 되리라.
신이 내린 기나긴 망명이 아이네아스의 운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멸망하는 트로이야를 뒤로한 채 아이네아스는 살아남은 백성들을 이끌고 배를 몰아 약속의 땅 이탈리아를 찾아가는 긴 여행길에 오른다. 트로이야를 떠날 때 아이네아스가 걸을 수 없는 아버지를 강인한 어깨를 짊어지고 간 까닭에 훗날 바로크 시대의 위대한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1680) 또한 아버지를 어깨에 진 모습을 통해 로마 건국의 사명을 짊어진 아이네아스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시각화했다.
그렇게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바로 그 영웅처럼 망망대해를 떠돌던 아이네아스 일행은 도중에 심한 풍랑을 만나 북아프리카 해안에 표류하고, 그곳 카르타고에서 여왕 디도의 환대를 받는다. 디도는 지친 일행을 위해 연회를 베풀고 아이네아스에게 그가 겪은 일들을 들려달라고 청한다. 이에 아이네아스는 트로이야의 함락된과 지중해를 정처 없이 표류한 자기 신세를 소상하게 들려준다. 이 과정에서 여왕 디도는 자기도 모르게 아이네아스를 향한 불타는 연정에 사로잡힌다.
아아, 예언자들은 얼마나 무지한가! 사랑에 미친 자에게 서약이나 신전은 또 무슨 소용인가! 그동안 내내 정염은 그녀의 부드러운 골수를 파먹고, 그녀의 가슴속에서는 사랑의 상처가 말없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불행한 디도가 불길에 휩싸여 온 도시를 정신없이 쏘다니니, 그 모습은 마치 화살 맞은 암사슴 같았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 일행과 떨어져 아이네아스와 단둘이 있게 되자 디도는 어느 동굴에 들어가 아이네아스와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카르타고에서 편안하게 머무는 동안 새 왕국 건설의 사명을 잠시 잊은 아이네아스에게 신들의 신 윱피테르는 메르쿠리우스(그리스어로 에르메스)를 보내 자신의 말을 전하게 한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이네아스는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의 포도가 된 디도가 간절하게 매달린다.
그대가 도망치기 전에 내 품에 그대의 아이라도 안겨주어 내 궁전에서 작은 아이네아스가 뛰놀기라도 한다면, 그리하여 그대의 이 모든 잔인한 짓에도 불구하고 그 애가 자기 얼굴로 그대를 연상하게 해준다면, 나는 이렇게 완전히 무너지고 버림받은 느낌은 들지 않으련만!
아이네아스는 디도의 간절한 애원을 뒤로 한 채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의 길을 따라 떠나고, 사랑하는 연인과 생이별한 디도는 실연의 아픔을 이기지 못해 끝내는 죽음을 택한다. 화가들이 이 매혹적이고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냥 뒀을 리가 있겠는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일화가 바로 이것이었으니.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 프란체스코 솔리메나의 <아이네이아스와 아스카니우스로 변장한 큐피드를 맞이하는 디도>가 바로 이 이야기를 형상화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그림에 큐피드가 등장하는 까닭은 아이네아스의 어머니인 비너스가 큐피드를 시켜 몰래 아이네아스의 아들로 변장하게 한 뒤 아이네아스 못지않게 그 아들을 사랑한 디도를 사랑에 눈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그림의 존재를 얼마 전에 읽은 이택광의 『중세의 가을에서 거닐다』(아트북스, 2008)에서 처음 봤는데, 국내에서 최초로 라틴어 원전을 故 천병희 교수가 우리말로 옮긴 숲 출판사 판 『아이네이스』 앞쪽에도 같은 작품의 도판이 실려 있다. 같은 책에 이탈리아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의 <디도의 죽음>도 소개됐다.
더 흥미로운 것은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만나려고 저승 세계로 간 아이네아스가 그곳에서 아직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채로 지하 세계를 헤매는 디도를 만나는 장면이다. 디도의 죽음을 나중에 알게 된 아이네아스는 그녀의 모습을 알아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불행한 디도여, 그대가 죽고 칼로 인생을 마감했다고 들었거늘, 그러니까 그 소식이 사실이었단 말이오? 아아, 그대가 죽은 것은 나 때문인가요? 별들에 걸고, 하늘의 신들에 걸고, 그리고 지하 깊숙한 곳에 신성한 것이 있다면 그것에 걸고 맹세하노니, 나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그대의 해안을 떠났소, 여왕이여. 지금 이 그림자들을, 이 울퉁불퉁하고 버림받은 장소들을, 그리고 칠흑 같은 밤을 지나가도록 내게 강요하시는 신들의 지시가 그대의 곁을 떠나도록 엄명을 내렸다오. 내가 떠나는 것이 그대에게 그토록 큰 고통을 줄 줄은 미처 몰랐소. 발걸음을 멈추고 내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시오. 누구 앞에서 그대는 도망치는 것이오? 이것이 그대에게 말을 걸도록 운명이 허락한 마지막 기회란 말이오.
아이네아스는 눈물로 호소하지만, 화가 난 디도는 대꾸조차 안 하고 고개를 돌려 가버린다. 그리고 자기보다 먼저 떠난 전 남편과 혼령이 돼 해후한다. 베르길리우스는 이 대목을 다음 문장으로 정리한다. “아이네아스는 그녀의 부당한 운명에 충격을 받아 그녀를 한참 동안 눈물로 떠나보내며 멀어지는 그녀를 측은히 여겼다.” 어찌 됐든 디도의 죽음은 아이네아스의 탓이었으니, 사후 세계라는 장치를 통해 어떻게든 아이네아스의 찜찜했던 과거를 해소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여겼으리라.
『아이네아스』 제6권 <저승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다>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단테의 『신곡』을 떠올리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단테가 저승을 문학적으로 설계하면서 베르길리우스가 쓴 이 장에서 압도적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컸던지, 단테는 아예 『신곡』의 지옥편과 연옥편에서 주인공인 단테 자신의 스승이자 길잡이로 베르길리우스를 등장시킨다.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선대의 위대한 문학가에게 이보다 더 큰 헌사가 어디 있겠는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서 무한한 영감을 얻은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스』를 쓰고, 거기서 압도적인 영향을 받은 단테가 『신곡』을 썼으니, 자고로 서양미술사를 제대로 공부하려면 이 위대한 인류의 고전을 섭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베르길리우스의 로마 건국 신화 『아이네이스』를 읽고 깨달은 바가 적지 않다.
2026년 한 해도 부지런히 읽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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