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49) 특별전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친애하는 살바도르 씨,
당신이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페르메이르의 작품 <레이스를 뜨는 여인>을 저를 위해 모사해 주시기로 한 약속을 확인하고자 이 편지를 씁니다. 합의된 대가는 미화 5,000달러입니다. 이 작품은 당신이 완전히 고전적인 기법으로 제작하는 유일한 모사본이 될 것입니다. 또한 제가 이번 작품에 만족한다면, 당신은 같은 금액인 5,000달러를 받고 제가 원하는 또 다른 페르메이르의 작품을 모사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제가 선택하는 작품은 미국에 소장된 페르메이르의 그림 중 하나일 것입니다.
현재 당신이 구상하고 있는 <레이스를 뜨는 여인>의 모사본을 저는 아주 간절히 원합니다. 그것을 구할 수 있다면 저에게 큰 기쁨이 될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미술에, 특히 네덜란드 화파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도 매우 큰 가치를 지닐 것이라고 믿습니다.
며칠 전, 당신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오는 3월 중순 파리에 도착하시면 잠시라도 다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과 부인께 따뜻한 인사를 전하며,
진심을 담아,
로버트 리먼
1956년 2월 25일 자로 뉴욕에 머물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에게 보낸 편지다. 달리에게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페르메이르의 <레이스를 뜨는 여인>을 모사해 달라고 진지하게 부탁하며 이 편지를 쓴 이는 로버트 리먼(Robert Lehman, 1891~1969). 한때 미국의 4대 투자은행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거대 금융그룹 리먼 브라더스(Lehman Brothers Holdings Inc.)의 창업자 이매뉴얼 리먼(Emanuel Lehman, 1827~1907)의 손자다.
독일 이민자 출신의 리먼 삼 형제 중 둘째인 이매뉴얼의 아들 필립 리먼(Philip Lehman, 1861~1947)은 금융업으로 쌓은 가문의 부(富)를 바탕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그 유산은 아들 로버트 리먼에게 자연스럽게 대물림됐다. 로버트는 특히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로 이어지는 프랑스 회화, 즉 인상주의와 그 이후의 미술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작품을 모았다. 세계적인 화가였던 살바도르 달리에게 옛 명화를 모사해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영향력을 지닌 미술품 수집가였을 것이다.
약속은 지켜졌을까. 그랬다. 살바도르 달리는 실제로 1955년에 이미 로버트 리먼이 모사해달라고 부탁한 페르메이르의 그림 <레이스를 뜨는 여인>을 완성했다. 오른쪽 위 여백에 달리(DALI)라는 서명이 보인다. 페르메이르의 원작과 달리의 모사본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면, 두 그림은 세부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빛’과 ‘색감’과 섬세한 붓 터치가 안타깝게도 달리의 그림엔 없다.
로버트 리먼은 달리의 모사본에 만족했을까. 편지에 쓴 대로, 달리의 모사에 만족해 미국에 있는 또 다른 페르메이르 작품의 모사를 달리에게 추가로 부탁했을까.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서 나는 이 점이 몹시도 궁금했다. 내가 로버트였다면, 더 부탁하지 않았을 것 같다. 아무튼 달리가 모사한 이 그림의 가치는 ‘달리’라는 세계적인 화가가 그렸다는 데 있지, ‘모사본’이라는 데 있는 게 아니다. 달리보다 훨씬 더 모사를 잘하는 화가가 그 시대에도 차고 넘쳤을 것이므로.
살바도르 달리의 예술 세계를 아는 이들에겐 뜻밖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 그림이 한국에 왔다.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을 대표하는 컬렉션의 하나라는 ‘로버트 리먼 컬렉션’ 65점을 포함해 소장품 81점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특별전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2025.11.14.~2026.3.15.)의 시작을 알리는 첫 그림으로 전시장에 걸린 것. 살바도르 달리라는 굴지의 화가에게 모사를 부탁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수집가였다는 점을 처음부터 분명히 해두려 한 거로 보인다.
생전에 수집품을 여러 미술관에 기증할 정도로 미술품의 사회 환원에 진심이었던 로버트 리먼은 1975년에 소장품 수십 점을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기증했고, 박물관은 이에 화답해 리먼이 나고 자란 가문의 저택 분위기를 재현한 리먼 윙(Lehman Wing)이란 공간을 기증자에게 헌정했다.
나는 이 전시를 2025년의 마지막 날 밤에 봤는데, 나처럼 한 해의 마지막을 의미 있게 보내려는 이들이 많았는지 근래 보기 드물게 전시장이 북적이는 통에 제대로 작품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기가 힘들었다. 물론 좋은 전시에 많은 사람이 몰리는 건 좋은 일이다. 문제는 전시 관람 환경은 차치하고 벽에 걸린 작품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을 인상주의 시대의 그림이 내게 아무런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살바도르 달리로 시작하는 전시장은 앙티 마티스, 쉬잔 발라동, 폴 고갱, 폴 세잔, 오노레 도미에, 오딜롱 르동, 에두아르 뷔야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키스 반 동겐, 메리 커샛, 테오도르 루소, 빈센트 반 고흐, 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조르주 루오, 모리스 위트릴로, 카미유 피사로, 알프레드 시슬레, 에드가 드가, 피에르 보나르, 모리스 드 블라맹크 등 한 시대를 주름잡은 유명 화가들의 그림으로 가득했다.
전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그림은 프랑스 아카데미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코(Pierre Auguste Cot, 1837~1883)의 <봄 Springtime>이었다. 스마트폰을 치켜들고 사진을 찍으려 안간힘을 쏟는 관람객들이 그림 앞에 가득 모여서 있어서 제대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이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첫째는 잘 그렸고, 둘째는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취향은 강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주목한 작품은 키스 반 동겐의 <마리아>, 조르주 루오의 <신비로운 풍경>, 카미유 피사로의 <겨울 아침의 몽마르트르 대로>, 알베르 마르케의 <햇빛을 받는 알제리의 부지 항구>다. 카미유 피사로는 19세기 말, 쭉쭉 뻗은 대로를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는 대도시 파리의 풍경을 15점이나 남겼다. 전에 읽은 책 『파리는 그림』(에이치비프레스, 2022)에는 15점으로, 전시장에 붙은 작품 설명에는 14점으로 돼 있다. 지중해의 푸른 빛을 담은 알베르 마르케의 그림에선 오지호의 항구 그림을 가만히 떠올려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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