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50) 박은선 개인전 《치유의 공간》
내가 아는 한, 조각가 박은선은 동시대 한국 작가 가운데 세계 무대에서 가장 성공한 예술가다. 박은선은 1965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경희대 조소과를 졸업한 국내파로, 1993년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라 세계적인 대리석 산지로 유명한 카라라 국립 미술아카데미(Accademia di Belle Arti di Carrara)를 졸업했다. 이후 조각의 성지라 불리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에 터를 잡고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유럽 무대에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박은선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업적은 실로 놀랍다. 이탈리아 3대 갤러리인 콘티니 갤러리(Contini Art Gallery)의 전속 작가로 피에트라산타 두오모광장(2024), 로마 콜로세움 고고학공원(2024),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2016)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박은선의 작품은 이탈리아 황제 포럼 박물관(Museum of the Imperial Fora), 이탈리아 헨로 재단(Henraux Foundation), 스위스 취리히 국립대학(University of Zurich) 등에 소장됐고, 이탈리아의 여러 공공장소와 미술관에서 영구 전시되고 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2018년 피에트라산타 시(市)가 매년 최고의 작가에게 주는 프라텔리 로셀리(Fratelli Rosselli)를 수상했고, 한국인 최초이자 외국인으로는 역대 세 번째로 피에트라산타 명예시민으로 위촉됐다.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Andrea Bocelli)와의 장르를 뛰어넘은 협업으로도 유명하다. 2022년 여름, 박은선은 안드레아 보첼리의 요청으로 그의 고향인 토스카나 주 라이아티코(Lajatico)에 있는 야외 공연장 테아트로 델 실렌치오(Teatro del Silenzio)에서 열린 콘서트 무대에 자신의 대표작 <무한 기둥>을 선보였다. 박은선은 이 공연을 위해 장장 8개월에 걸쳐 11m 높이의 대형 작품을 특별 제작했다고 한다. 안드레아 보첼리는 해마다 저명한 예술가들의 조형 작품으로 무대를 꾸며왔는데, 박은선은 한국은 물론 아시아 작가 최초로 이 멋진 무대에 초대됐다.
박은선의 위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는 박은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의 탄생이다. 2025년 5월,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 중심부에 박은선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 ‘Atelier-Museum Park Eun Sun(아틀리에뮤지엄 박은선)’이 문을 열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Mario Botta)가 설계한 이 미술관은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체를 통틀어 한국 작가의 이름이 걸린 보기 드문 공간이다.
박은선과 마리오 보타의 인연은 국내로도 이어져, 현재 전라남도 신안군 자은도에 마리오 보타의 설계로 ‘인피니또 미술관(Infinito Museum)’ 공사가 올해 10월 말 개관을 목표로 한창이다. 두 거장은 2025년 제19회 베니스 건축비엔날레 기간 《Museo Infinito – Park | Botta》 전시를 통해,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인피니또 미술관의 건축 모형과 박은선의 조각 및 회화 작품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며 조각과 건축이 서로 호응하는 공간적 대화를 구현했다. 나는 일찍이 자은도에 작업실을 얻어 사는 조풍류 작가의 안내로 인피니또 미술관이 들어설 부지를 여러 차례 가볼 수 있었다.
편안하고 안정된 길보다, 전업 작가로서 조각의 본고장에서 승부를 보고 싶었다. 1993년부터 세계의 조각가들이 선망하는 조각의 본고장 피에트라산타에서 작업하며 수많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거쳤다. 절벽 끝에 서 있는 것 같은 피 말리는 순간들이 많았지만, 좌고우면(左顧右眄) 하지 않고 진격했더니, 모든 조각가가 가장 염원하는 ‘피에트라산타 시(市)에 작품 영구 설치’라는 목표를 이루게 됐다.
왜 안 그랬겠는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조각의 본고장에서 저 멀리 떨어진 작은 나라에서 조각을 배운 낯선 동양인이 자기 예술로 인정받고 성공하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이었을까. 박은선은 오로지 그곳에서 예술가로서 승부를 보겠다는 일념으로 30년을 버텼고, 이제 비로소 자신의 오랜 꿈이 이뤄지는 모습을 감격에 차 바라보고 있다. 그 덕분에 국내 미술계에는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졌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박은선의 작품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서울 을지로 하나은행 본사와 도곡동 타워팰리스 앞에 박은선의 작품이 서 있고, 최근에는 서울 성수동 무신사 S1 사옥에 3.5m 높이의 <Collegamento tra Cubi e Sfere II>가 설치됐다. 또 서울 한남동 유엔사 부지에 들어설 더 파크사이드 단지에도 박은선의 대표작 <무한 기둥>이 설치될 예정이다.
박은선의 개인전 《Spazio della Guarigione 치유의 공간》이 2025년 11월 12일부터 2026년 1월 25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2023년 이후 국내에서 3년 만에 열리는 개인전이자, 2008년 인사아트센터 전시 이후 17년 만에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전시다. 전시 제목인 《Spazio della Guarigione》는 한국어로 ‘치유의 공간’을 의미한다. 박은선이 돌이라는 가장 고전적인 재료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며,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경계를 넘나들며 제시한 시간과 존재, 그리고 치유의 개념을 집약적으로 선보인다.
박은선의 대표작 <무한 기둥(Colonna Infinita)>은 수직으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기둥 형태로, 박은선의 예술 세계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리석과 화강암을 기반으로 한 수직적 조형물로, 단순히 하나의 돌기둥이 아니라 두 가지 돌이 반복적으로 중첩되며 생성된 결과물이다. 박은선은 망치나 끌을 사용해 덩어리를 깎아내며 형상을 만들어내는 전통적인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작업 방식을 고안해냈다. 대리석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Carrara) 지역에서 생산되는 두 가지 색 대리석을 주로 사용하며, 때로는 화강암도 병용한다.
박은선은 재료들을 수평으로 잘라 켜켜이 쌓은 다음, 깨뜨리고 벌려가며 의도적으로 틈을 만들어낸다. 하나의 돌을 깨고, 다른 색깔의 돌을 깨서 에폭시로 판을 붙여 나가는 과정을 반복한 뒤 마지막에 형태를 다듬는다. 번갈아 쌓아 올린 서로 다른 색의 석판(石板)이 만들어낸 줄무늬가 리듬감을 만들고 일부러 만든 틈은 일종의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데, 이때 서로 다른 색의 결합은 외국에 거주하는 작가 자신의 이중성을 상징한다.
멀쩡한 돌을 깨뜨리고, 힘들게 벌려 틈을 만드는 작가는 나뿐일 거다.
그런데 그 틈과 균열이 내겐 숨통이다.
꽉 막힌 것에 신선한 생명의 공기를 불어 넣듯 말이다.
가나아트센터 야외 공연장에서 5m 높이의 <Colonna Infinita- Accrescimento(무한 기둥-증식)>(2019)과 3m 높이의 <Colonna Infinita- Continua(무한 기둥-연속)>(2025) 등 무게 8톤에 달하는 대형 조각을 먼저 감상한 뒤 첫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박은선이 2024년과 2025년에 완성한 조각과 회화 신작이 관람객을 맞는다.
<Untitled 무제>라는 같은 이름이 붙은 일련의 회화는 박은선이 자신의 대표작 <무한 기둥>을 평면화한 작품이다. 수직으로 상승하는 기둥의 형태를 수평으로 전환하고, 먹의 농담을 통해 그 형태가 스며들고 배어 나오는 과정을 반복했다. 마(麻)로 짠 캔버스 위에 먹이 자연스럽게 번지며, 물성과 정신성이 교차하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박은선은 한국 전통 문화의 상징적 재료인 마와 먹을 통해 재료 본연의 물성을 최대한 살리는 동시에, 자신만의 예술적 정체성과 동양적 미감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얼마나 더 깊이, 더 치열하게 파고드느냐가 관건이다. 더 새롭고, 더 묵직한 작품을 내놓는 게 내 숙제다.”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면 나타나는 두 번째 전시 공간에선 2020년 이후, 특히 2025년에 주로 제작된 박은선의 근작과 신작을 두루 만나볼 수 있다. 박은선의 작업은 ‘균열과 축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단단한 돌의 표면에 드러난 균열은 돌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자연의 흔적이며, 그에게 틈(균열)은 힘든 삶에 대한 숨통이자 사유의 장(場)이다. 박은선은 <무한 기둥>을 통해 끝없이 뻗어 나가는 형태의 반복 속에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욕망의 영속성과 그 안에 내재한 본질을 탐구한다.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때 작품의 모티브는 ‘무한’이 아닌 ‘기둥’의 형태였다. 우연히 길을 걷다 마주친 깨진 하수도관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도로 정비 과정에서 드러난 거칠고 솔직한 형태에서 박은선은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 속에는 자신감과 온전히 쏟아낸 희생정신이 드러나 있었다. 박은선은 “속이거나 꾸미려는 순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된다.”고 말하며, 진정성을 작업의 근원으로 삼는다.
내 작품은 인간의 내부 상태를 느낄 수 있게 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내 작품의 특징인 흰색과 회색, 빨간색과 검은색의 조합은 정돈과 혼란의 대비를 보여준다. 두 가지 색의 배합은 이면성을 상징한다. (…) 내 작품은 인간의 소망, 진보, 희망으로 연결될 수 있는 무한공간으로의 팽창, 또는 끝없이 증식하는 힘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자 한다.
벽에 작가 연보가 빼곡하게 적힌 통로를 지나 세 번째 전시 공간에 이르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작품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매끈한 표면의 대리석 구(球)가 알알이 매달려 기둥을 이루고 색색의 빛을 내는 <Colonna Infinita- Diffusione(무한기둥- 확산)>(2025) 연작이다. 이 작품들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탄생한 것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에 대한 역발상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디퓨지오네’는 이탈리아어로 ‘확산’을 의미하는데, 박은선은 이 작업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다시 만나는 희망의 확산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박은선은 오랜 시간 천착해 온 수직적 기둥 구조를 수평적이고 유기적인 흐름으로 전환하며, 에너지의 방향성을 ‘상승(Ascensione)’에서 ‘확산(Diffusione)’으로 변화시켰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바로 LED를 설치해 대리석 고유의 색과 결을 더 생생하게 드러냈다는 점이다. 박은선은 대리석 고유의 색을 표현해낼 방법을 고민하다가 LED 조명을 대리석 안에 달기 위해 구 내부를 8mm 두께로 파낸 다음 LED 등을 달아 색을 표현했다. 구 내부에 들어가는 조명은 실제 요트에 쓰이는 최고급 LED 등으로, 빛이 확산하며 만들어내는 미묘한 색채의 층을 보여준다.
구(球)에 있는 틈새는 내가 의도적으로 매끄럽게 만든 표면과는 다르게 서로 대비되는 감정을 표현한다. 사랑-미움, 슬픔-행복, 흥분-고요. 이 모두가 인간의 존재 과정 중 하나에서 또 다른 하나로 이전되는 자연스러운 심리 상태다.
<Cubo>(2025)는 유색 대리석을 결합해 만든 292개의 구(球)를 천장애 설치된 스테인리스 판과 연결한 줄을 매달아 놓은 정육면체(큐브) 형태의 설치 조각이다. 작품명에서도 알 수 있듯, 대리석 구를 반복적으로 배열해 큐브 형태를 구축하며 그 정형 속에서 구조적 긴장감을 느끼도록 설계했다. 와이어에 구를 하나하나 연결해 정확한 위치에 맞추는 과정은 높은 정확성과 섬세함을 요구하며, 박은선은 이러한 배열과 반복을 통해 작품 속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조화를 탐구한다.
이 작품은 시각장애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가 박은선의 조각 틈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거나 손으로 형태를 더듬으며, 오감으로 작품을 경험했다는 일화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된 작품이다. 이 경험을 계기로 박은선은 조각이 지닌 감각적 확장성에 주목하며, 조각을 통해 단순히 형태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 보고, 듣고, 느끼는 다감각적(Multisensory) 예술을 구현하고자 했다. 나아가 이러한 조형적 탐구를 인터렉티브 아트(Interactive Art) 영역으로 확장해, 작품과 관람객의 감각이 서로 연결되는 새로운 예술적 장을 열고자 한다.
화분에서 화초처럼 자라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조각 석 점을 가만히 바라본다. 알알이 매달린 동그란 구(球)에는 어김없이 부서지고 깨져 갈라진 흔적이 있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디 그러하지 않은가. 살면서 끊임없이 부딪치고 또 부딪치고 또 부딪치길 반복하는 과정에서 입은 상처들이 미처 다 아물지 않아도, 그런 흔적들마저 안고 살아가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니겠나. 그러면서도 더 고귀한 목표와 이상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키를 높여나가는 것. 나는 박은선의 이 작품에서 인간 존재의 숙명을 엿보았다.
참고로 전시장 외부 야외 공연장 객석 맨 꼭대기 위에 자칫 놓치기 쉬운 박은선의 작품 한 점이 더 있다.
그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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