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52) KBS <모던코리아> 한국미술 2부작 ②여성민중미술
여성이 화가가 된다는 꿈을 꾸기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그림에 타고난 재능이 있어서 남들이 다 알아주는 미술대학에 진학해 화가의 꿈을 무럭무럭 키워도, 정작 시집가면 끝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학생이 그림을 포기하면 다들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니 여성 화가들의 경력 단절은 흔한 일이었다. 붓을 놓고 아내로서, 엄마로서, 가정주부로서 남편과 자녀들 뒷바라지에 집안일 십수여 년 하다 보면 그림은 어느새 먼 추억의 한 자락으로만 남을 뿐이었다.
화면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초반에 대학에 들어간 다섯 여성을 차례차례 비춘다. 양은희, 김종례, 이기연, 정정엽, 성효숙. 이 가운데 지금도 현역 화가로 활동하는 이는 정정엽뿐이다.
대학에 들어가 자유의 공기를 한껏 만끽하던 젊은이들은 한때 너도나도 탈춤반에 들어갔다. 탈춤을 비롯한 전통 민속놀이는 당시 대학가에서 저항적인 문화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 막상 미술대학에 들어갔지만, 근본적인 의문은 같았다. 그림이 밥 먹여주나? 미술대학을 나와 남들 다 하는 것처럼 결혼해 아이를 낳아 키웠다. 아이들이 자라 학교에 가게 되자, 그제야 내 시간이 생겼고, 문득 그림이 생각났다. 집 근처 미술학원에 등록해 입시생들과 석고 데생부터 다시 시작했다. 김종례의 증언이다.
1980년 5월 18일. 그날의 진실이 세상을,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꿔놓았다. 미술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그림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그때부터 그림이 확 바뀌었다. 엄혹했던 시절에 화가 지망생들은 마침내 그림의 효용성을 깨달았다. 운동권에서 예술대 학생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운동을 하려면 음악이나 미술을 버리고 와라!
그때 걸개그림이 등장했다.
미대생들은 걸개그림부터 판화, 달력 그림 등 다양한 매체 실험을 전개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곳곳에서 미술 소모임이 결성되고 문화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중 하나인 ‘두렁’에 여러 여성이 함께했다. 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지상 과제 아래 너도나도 공장에 취업해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미술이 쓸모를 찾았다. 그래서 좋았다.
익명에서 실명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새로운 그림을 향한 욕구가 싹텄다. 뭘, 어떻게 그리지? 이게 그림이 될까? 김종례는 오랜 준비 끝에 연 첫 개인전에서 할머니를 그린 그림들을 선보였다. 당시 잘 나가던 미술평론가 유홍준이 서문을 써줬다. 1985년의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그해 한국 미술계에 기억할 만한 사건이 터졌다. 1985년 7월 20일, 민중미술 작가들의 단체전 <한국미술 20대의 힘> 전에 경찰이 출동해 작품을 철거한 것. 훗날 ‘힘전 사태’로 불린 이날 전시에서 작품 36점이 압수되고 작가 19명이 연행됐다. 매스컴은 연일 불온한 민중미술을 원색적으로 공격했다. 신문 문화면이 아니라 사회면이었지만, 이 사건은 대중이 민중미술의 존재를 아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힘전 사태’를 계기로 그동안 다양한 갈래로 활동하던 현실 참여적 미술인들은 1985년 11월, ‘민족미술협의회’를 결성한다.
1987년.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민중미술 계열에서 활동하던 여성 작가들은 여성 인권, 여성 미술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편적 인권이라는 대의에 비하면 여성이라는 주제는 너무 작다는 시선이 많았다. 민미협 내부에서조차 그런 목소리가 작지 않았다. 1992년에 열린 김종례의 두 번째 개인전은 7년 전의 첫 번째 개인전과 달리 유홍준 등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김종례는 그때의 기억을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다.
2025년 12월 28일(일) 밤 11시, KBS 1TV에서 방영된 KBS <모던코리아> ‘한국 미술 2부작’의 제2부 ‘여성-민중-미술’은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안팎에서 활동한 여성 화가들의 증언을 통해 여성, 민중, 미술의 교집합을 당시 뉴스를 비롯한 다양한 영상 자료를 이용해 입체적으로 추적한다. 양은희, 김종례, 이기연, 정정엽, 성효숙 다섯 분의 증언은 더없이 귀하다. 방송이 끝나갈 무렵, 카메라는 민중미술의 시대로부터 긴 시간이 지난 현재, 그 다섯 명의 삶의 행로를 담담하게 비춘다.
민중미술 시대 여성 화가들의 활동상을 본격적으로 조명한 프로그램은 일찍이 없었다. 이 프로그램은 KBS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다시 볼 수 있다.
■[다시보기] KBS <모던코리아> 한국미술 2부작 ②여성-민중-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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