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를 압도한 구멍가게의 반란

석기자미술관(256) 노원아트뮤지엄 《인상파, 찬란한 순간들》 展

by 김석
20260116_141405.jpg 노원문화예술회관



지난해 역대 최다인 650만 명의 관람객을 끌어모으며 세계 3위 규모로 발돋움한 국립중앙박물관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근 서울 노원구청이 운영하는 노원아트뮤지엄의 행보는 단연 신선한 충격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두 곳에서 인상주의 회화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나란히 열고 있다. ‘국중박’이 메가급 대형마트라면, 노원아트뮤지엄은 동네 구멍가게다. 그런데 구멍가게 전시가 대형마트보다 훨씬 더 낫다.


노원아트뮤지엄은 서울 노원구청이 운영하는 노원문화예술회관 4층과 5층을 전시 공간으로 쓰고 있다. 애초에 전문 전시 공간도 아닐뿐더러, 다 합해 봐야 면적도 아주 작다. 하지만 물리적 한계가 명확한 이 공간을 활용하는 묘(妙)가 예사롭지 않다. 지난해 노원아트뮤지엄 전시 《뉴욕의 거장들》은 무려 6만 3,500여 명에 이르는 관람객을 동원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국립도 시립도 아닌 구립 미술관에서 여는 전시가 뭐 볼 게 있겠느냐는 편견을 보기 좋게 부숴버린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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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노원아트뮤지엄이 선보이는 또 한 전시가 다시 한번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다. 인상주의 시대를 빛낸 세계적인 화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 《인상파, 찬란한 순간들 : 모네, 르누아르, 반 고흐 그리고 세잔》(2025.12.19.~2026.5.31.)이 ‘국중박’ 부럽지 않은 관람객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 접근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서울 북쪽 끝 동네인데도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전시장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전시를 본 사람들의 호의적인 평가가 제대로 ‘입소문’을 탄 덕분이다.


20260116_144749.jpg 빈센트 반 고흐, <밀밭의 양귀비>, 1887, 캔버스에 유채, 54.5×65cm, 예수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주최 측이 하이라이트로 내세운 작품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라 해도 좋을 빈센트 반 고흐의 <밀밭의 양귀비>(1887)다. 반 고흐의 그림은 그동안 수많은 전시를 통해 국내에서 소개됐지만, 반 고흐의 작품 가운데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그림이 한국에서 전시되는 건 처음이다. 전경의 초록 밀밭과 빨간 양귀비꽃의 색채가 강렬한 대비를 이루면서 생동감 넘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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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16_142358.jpg 클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1907, 캔버스에 유채, 101.5×72cm,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주최 측이 대표작으로 내세운 또 한 작품은 수련 연작으로 유명한 인상주의 미술의 대표 거장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있는 연못>(1907)이다. 전시 공간이 작은 데도 오직 이 한 작품만을 위한 공간을 따로 꾸며 관람객들이 의자에 앉아 충분히 시간을 두고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배려했다. 지베르니에 정착한 이후 자기만의 연못을 꾸며 수련을 한가득 심은 모네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붓을 들어 그림을 그렸다. 수련 연작으로는 드물게 세로로 긴 화면에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거품의 형상이 어떤 영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모네의 그림은 <지베르니의 젊은 여인들, 햇빛 효과>(1894) 한 점이 더 걸렸다.


20260116_144512.jpg 클로드 모네, <지베르니의 젊은 여인들, 햇빛 효과>, 1894, 캔버스에 유채, 65×99.5cm,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Pissarro-portrait.jpg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



물론 이 두 작품도 좋다. 하지만 내가 이 전시에서 주목한 건 인상주의 시대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인상파 화가들의 ‘맏형’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의 작품들이었다. 유명세로 보나, 미술사적 위상으로 보나 카미유 피사로는 다른 거장들에 비하면 예나 지금이나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화가다.


20260116_144014.jpg 카미유 피사로, <에라니의 석양>, 1890, 캔버스에 유채, 65.2×81.3cm,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20260116_144241.jpg 카미유 피사로, <아침, 햇빛 효과, 에라니>, 1899, 캔버스에 유채, 66×81.7cm,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특기할 것은 전시 출품작 21점 가운데 피사로의 작품이 6점으로 가장 많다는 점이다. 무슨 의도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피사로의 그림 여섯 점을 한자리에서 볼 기회는 극히 드물다. 그 덕분에 나는 이번 전시를 통해 카미유 피사로라는 화가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20260116_142049.jpg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의 공장>, 1873, 캔버스에 유채, 38×55cm,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카미유 피사로가 세계 미술의 중심이었던 파리에 남겨준 가장 큰 유산은 도시 풍경화다. 피사로는 19세기가 저물어가던 1897년과 1898년 사이에만 15점에 이르는 도시 풍경화를 그렸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프랑스 예술사학자 제라르 드니조의 『파리는 그림』(HB PRESS, 2022)에 피사로의 도시 풍경화 석 점이 실렸는데, 저자가 본문에서 1897년 12월 피사로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인용한 대목이 있다.


“너한테 말한다는 걸 깜빡했는데, 그랑 호텔 뒤 루브르에서 오페라 거리와 팔레루아얄 광장 모퉁이 경치가 멋지게 보이는 방 하나를 구했단다! 그림 그리기가 아주 좋지! 미적으로 뛰어나진 않을 거야. 하지만 사람들이 추하다고 말하곤 해도 너무도 빛나고, 너무도 환하며, 너무도 생기 넘치는 파리의 길거리를 그려 볼 수 있어서 정말 기뻐. 그냥 대로들과는 전혀 다르지. 완전히 현대적이야!”


20260116_145333.jpg 카미유 피사로, <튈르리 정원, 오후, 햇살>, 1900, 캔버스에 유채, 74.4×91.9cm,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피사로는 이 편지에서 도시 풍경화를 그리는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완전히 현대적으로 변모한 파리라는 도시 풍경이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 빛나고, 환하고, 생기 넘치는 소재였던 것. 이번 전시에 출품된 피사로의 <튈르리 정원, 오후, 햇살>(1900)을 보라. 가슴이 탁 트일 만큼 시원하게 펼쳐진 도심 속 공원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화가가 느꼈을 청량감이 화폭에 고스란히 녹아 들었다. 분수 뒤로 멀리 보이는 크레인은 파리를 빛내는 세계적인 미술관이 된 오르셰 역 공사 현장을 가리킨다.


20260116_145836.jpg 카미유 피사로, <잔느의 초상>, 1893년경, 캔버스에 유채, 46.4×38.4cm,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피사로의 그림 가운데 가장 나를 강하게 사로잡는 건 마지막 전시 공간에 걸린 피사로의 <잔느의 초상>(1893년경)이었다. 그림 속 소녀는 피사로의 딸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잔느 마르그리트 에바다. ‘코코트’라는 애칭으로 불린 잔느는 열두 살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그림에 바짝 다가가 얼굴을 자세히 보면, 아파서 수척해진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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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저 눈동자는 대체 무엇을 향하고 있는 걸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딸아이의 모습을 가슴 미어지는 애처로움으로 바라봤을 화가의 마음이 읽히는 것 같다. 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르누아르의 그림에는 없는 애틋함이 피사로의 그림에는 있다. 그래서 다른 그림보다 오래 눈길을 주었다.


이 전시, 작지만, 알차다.


20260116_142838.jpg 차일드 하쌈, <여름 햇살(쇼얼스 제도)>, 1892, 캔버스에 유채, 51.4×61.5cm,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20260116_143030.jpg 폴 세잔, <강가의 시골 저택>, 1890년경, 캔버스에 유채, 81×65cm,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20260116_143530.jpg 폴 시냑, <예인선, 사모아의 운하>, 1901, 캔버스에 유채, 82×66cm,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20260116_144038.jpg 폴 고갱, <보지라르의 집들>, 1880, 캔버스에 유채, 81.5×116cm,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20260116_145536.jpg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꽃병의 장미>, 1880년경, 캔버스에 유채, 58.5×73.5cm,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



출품작 21점은 모두 예루살렘 이스라엘 박물관(The Israel Museum, Jerusalem) 소장품이다. 국립이나 시립이 아닌 작은 구립 미술관이 이 작품들을 빌려오는 과정이 어땠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KBS 유튜브 채널 크랩(KLAB)이 공개한 전시 소개 영상에 나오는 전시 기획자의 말만 들어도 알겠다. 결국, 노원아트뮤지엄이 이런 전시를 만들어낸 건 전시 담당자들의 ‘의지’였다. 더불어 이런 일은 구청장의 의지 또한 무엇보다 중요하다. 덕분에 같은 서울 안에서도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가 부족한 서울 북부 지역 시민들에겐 노원아트뮤지엄의 존재가 더 반가울 수밖에 없겠다.


■전시 정보

제목: 《인상파, 찬란한 순간들 : 모네, 르누아르, 반 고흐 그리고 세잔》

기간: 2025년 12월 19일~2026년 5월 31일

장소: 노원아트뮤지엄 (서울시 노원구 중계로 181)

문의: 02-2289-3428


전시를 관람하기 전에 유튜브 채널 크랩(KLAB)과 KBS 9시 뉴스 전시 소개 영상을 미리 보면 큰 도움이 된다.

■국중박, 너 나와!|크랩 (2025.12.25.)

https://www.youtube.com/watch?v=AYlrjvfadCo


■“빛을 사랑한 화가들”…교과서 속 명작들 한자리에 (KBS 뉴스9 2025.12.19.)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438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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