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60) 《손동현: 석양에 내려앉은 눈》
손동현 작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건 2010년 11월. 아시아 팝아트를 대표하는 한중일 작가 42명의 작품 150점을 선보인 대규모 기획전 《메이드 인 팝랜드》(2010.11.12.~ 2011.2.20.) 취재차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손동현 작가를 직접 만나 인터뷰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당시 손동현 작가는 슈퍼맨, 다스베이더, 로보캅 등 미국 대중문화 아이콘을 전통 한국화의 초상화 기법으로 그린 일련의 연작으로 미술계에서 떠오르는 전도유망한 작가로 이름을 알려 나가고 있었다. 미술을 취재한 지 얼마 안 된 새내기 미술 기자였던 내게도 손동현의 작품은 무척이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아톰·슈퍼맨 등 화폭 안에 ‘쏙’ 팝아트의 세계 (KBS 뉴스9 2010.11.10)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2191330
하지만 그 뒤로는 이상하리만치 작가와 인연이 닿지 않았고, 그렇게 20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 사이 간간이 작가의 전시회 소식을 접하긴 했지만, 내가 게으른 탓인지 개인전 한 번 제대로 못 가봤다. 그러다 2024년 봄, 우연히 책을 읽다가 손동현이란 이름을 다시 마주쳤다. 미술사학자 이인숙이 ‘우리 부채그림의 역사와 미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 『선면화의 세계』(눌와, 2024)에 동시대 작가로는 유일하게 손동현의 작품을 소개해 놓은 것.
손동현 작가는 2012년 부채 50자루에 비행물체를 그려 넣은 ‘하이퍼스페이스(Hyperspace)’ 연작을 통해 일찍이 본 적 없는 색다른 부채 그림을 선보였다. 2020년 교보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손동현 개인전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2020.7.7.~8.25)에서 50점 전체가 공개돼 주목받았다. (이 전시 제목은 일렉트로닉 음악의 전설로 불리는 프랑스 듀오 다프트 펑크가 2001년에 발표한 정규 2집 「Discovery」 네 번째 트랙에서 따온 것이다.) 이인숙은 손동현의 작품집 『손동현: 2005-2016』에 작가 자신이 밝혀 놓은 창작 동기를 다음과 같이 인용해 소개했다.
<Hyperspace>의 경우는 형식이 먼저 작업의 내용을 결정하게 해준 경우입니다. 부채를 접으면 그 위에 그려진 그림이 압축되는 모습에서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서 통용되는 초공간 도약 개념을 떠올렸습니다. 현실 세계와 물리법칙이 다른 초공간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랄까요. 그리고 다시 펼치면 바람을 일으키는 제 모양으로 돌아오기에 상상의 병기/이동수단인 우주선들과 부채가 잘 어울린다고 봤죠.
이인숙은 손동현의 예술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손동현 작가처럼 연예인, 영화, 무협지, 코믹스, 망가 등 글로벌 대중문화를 동양화의 매체와 재료를 통해 소화한 작가는 없다. 손동현은 21세기를 사는 작가이자 문화소비자로서 동시대의 취향과 관심사를 자신의 예술에 반영했다. 동시에 그는 동아시아 전통 화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탐구도 멈추지 않는다. (중략) 손동현은 접부채라는 고색창연한 매체에 4차원 이상의 초공간(超空間) 하이퍼스페이스를 이동하는 공상과학영화의 우주선을 먹과 담채로 그렸다. 부채를 접으면 우주선이 사라진다는 발상은 축지법(縮地法)으로 워프(warp) 드라이브를 하는 것 같은 문화적 충돌을 신선하게 발생시킨다.” 이인숙의 책을 통해 나는 손동현이라는 작가를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
손동현 작가가 이번엔 근현대 한국화의 대가 청전 이상범(1897~1972)의 생전 체취가 서린 집이자 화실이었던 ‘청전 이상범 가옥’에서 전통 한국화를 현대적으로 변주한 신작을 선보이는 개인전 《손동현: 석양에 내려앉은 눈》을 연다. 애초에 이 전시는 2025년 5월 9일부터 11월 27일까지 열릴 예정이었지만, 2005년에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상범 가옥 보수 공사로 인해 2025년 9월 20일까지만 진행한 뒤 공사 기간에 잠시 쉬었다가 12월 16일 다시 문을 열어 2026년 3월 31일까지 열린다. 전시를 중간에 끊었다가 다시 이어가는 일은 극히 드문 사례다.
서울시 종로구 누하동 178. 이정표 하나 없는 길에서 골목 안으로 뉘엿뉘엿 발걸음을 옮기면, 좁은 골목 안쪽 끝에 문이 빼꼼 열린 대문이 보인다. 새 도로명 주소 필운대로 31-7. 대문 오른쪽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붙었다. 정식 명칭은 국가등록문화유산 제171호 「이상범 가옥 및 화실」. 왼쪽 위에는 한자로 이 집의 주인이었던 李象範 문패가 붙어 있다.
2015년 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서울 답사 첫 일정을 취재한 뒤 이후 기자가 아닌 답사객으로 유홍준 교수가 이끄는 서울 답사 일정에 함께했다. 사직단에서 시작한 첫날 답사 일정에 포함된 이상범 가옥을 그때 처음으로 가봤다. 벌써 10년도 넘은 일이다. 툇마루에 죽 둘러앉아 유홍준 선생의 맛깔난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던 기억이 난다. 당시 뉴스 화면에 그때의 추억이 남아 있다.
이 집 오른쪽에 직각으로 붙어 있는 또 다른 집이 청전의 작업 공간으로 쓰인 청전화실이다. 대문 오른쪽에 역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붙었고, 왼쪽에는 한자로 이곳이 청전의 작업실이었음을 알리는 靑田畫室 문패가 걸려 있다. 대문 오른쪽 담벼락에는 문화체육부와 1995년 미술의 해 조직위원회가 만든 표석이 있다. 골목 끝 이상범 가옥만 공개될 뿐, 화실이었던 옆집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이상범 가옥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에 이상범 가옥의 내력을 설명한 안내판이 서 있고, 문 하나를 더 건너 마당 안에 발을 디디면 기역 자 모양의 아담하고 소박한 안채가 나온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위에 ‘청전이상범가옥’ 한글 현판이, 옆에 한자로 ‘樓下洞天’이라 적힌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누하동천’은 이상범의 당호(堂號)이다. 기역 자 건물 기둥에는 옛 시구를 적은 주련(柱聯) 8개가 붙어 있다. 모두 가정의 평화와 화목, 길상(吉祥)을 바라는 내용이다.
신발을 벗고 대청마루에 발을 들이면 손동현 작가의 8폭 병풍 작품 <사계산수 四季山水>가 관람객을 맞는다. 작가가 청전 이상범을 비롯한 여러 한국화가가 즐겨 사용했던 전통 사계산수(四季山水) 구성을 비선형적 방식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각 폭에 사용한 재료와 기법이 모두 다른 이 작품은 선이면 선, 색이면 색, 한국화의 오랜 전통을 해석하고 응용해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뛰어난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병풍이라는 형식 덕분에 보는 위치에 따라 작품이 주는 느낌이 사뭇 달라진다.
병풍을 바라보고 왼쪽에 있는 방이 바로 안방이다. 청전 이상범이 눈을 감은 곳이다. 안방 왼쪽에 있는 작은 다락방이 우리가 만나는 두 번째 전시 공간이다. 18점에 이르는 손동현 작가의 부채와 화첩 작품을 산수풍경처럼 배치해 놓은 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일찍이 한옥 다락방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예가 있었던가. 병풍으로 시작해 부채와 화첩까지 옛사람들이 그림 틀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현대적인 한국화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손동현 작가를 두 눈 크게 뜨고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안방을 돌아 나와 대청마루 건너로 걸음을 옮기면 응접실로 쓰인 안채에서 손동현 작가의 드로잉 7점을 만나게 된다. 드로잉부터 콜라주까지 청전의 작품을 아주 독특하고 색다른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가만의 개성과 재치가 돋보인다. 작은 드로잉이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생전에 청전은 화실로 연결되는 대청마루 오른쪽 방을 주로 썼다고 한다. 이 방에는 청전의 넷째 아들 이건걸의 작품 <안면도>가 걸려 있다. 바로 옆 화실은 청전이 생전에 쓰던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미술 도구와 재료부터 생전에 청전이 그리다 만 그림, 책장과 책상을 비롯한 각종 가구와 집기들, 사진과 글씨와 작품을 담은 액자가 천장 아래 죽 걸려 있다. 여기서 다시 대청마루 쪽을 바라보면 안방까지 일자로 뻗은 가옥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대청마루에서 신발을 신고 마당으로 나와 건물 왼쪽 끝에 있는 아랫방으로 가 문을 열면 이번 전시의 또 다른 대표작 <한림모설 寒林暮雪>이 서 있다. 이 작품에 관해선 여러 언론의 전시 소개 기사에 인용된 작가의 설명이 있다. “청전 특유의 완만한 산세와 서체추상에 가까운 필법 등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 영향은 개별 작업의 형식에 따라 다르게 적용했다. <한림모설>은 창전 작업 중 설경만을 모아 구도를 만들었지만, 완만한 산세가 모이고 쌓여 청전스럽지 않은 대관산수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번 전시는 이상범 가옥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 두 번째 사례다. 근대 한국화의 대표 거장으로 꼽히는 청전 이상범의 예술혼이 깃든 유서 깊은 공간을 장식한 손동현 작품을 통해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 옛것과 새것이 만났다. 그러므로 전시의 핵심은 이상범 가옥이라는 ‘공간’과 손동현의 참신한 ‘작품’이 스스럼없이 자연스럽게 섞이고 스며들었는가 하는 점일 터. 다만 우리 시대에 청전의 작품에서 예술적 자양분을 흡수해 자기 방식으로 소화할 줄 아는 한국화가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면 손동현의 작업이 지닌 가치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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