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61) 《조우(遭遇), 모던아트협회 1957-1960》
6·25 전쟁이 끝난 뒤 전후 복구가 한창이던 1950년대 후반, 한국 미술계에서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싹텄다. 국가 주도의 대한민국미술대전이 지향한 사실주의와 서구에서 물밀듯이 들어온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앵포르멜을 넘어서는 또 다른 가능성, 즉 ‘제3의 길’은 없는가. 한국 현대미술은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한 박고석, 유영국, 이규상, 한묵, 황염수 다섯 화가가 중심이 돼 1957년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한다.
이들은 이후 4년 동안 여섯 차례 전시를 열어 생활과 자연, 일상을 추상 언어로 전환하는 실험을 지속했다. 협회 결성을 주도한 다섯 화가 외에 문신, 정점식, 정규, 김경, 천경자, 임완규가 합류하면서 활동의 폭을 넓혔다. 이들에게 추상은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삶과 정신, 현실과 사유를 아우르는 태도였고, 다양성을 포용한 모던아트협회의 개방성과 융통성은 1960년대 이후 다양한 작가 그룹과 실험적 작업, 전시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청주에서 열리는 《조우(遭遇), 모던아트협회 1957-1960》(2025.10.2.~2026.3.8.)는 한국 미술사에서 모던아트협회가 차지하는 위상과 시대적 의미를 돌아보는 뜻깊은 자리다. 전시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요즘 가장 핫한 AI 영상이었다. 전시에 작품이 소개된 화가들의 낡은 사진을 생성형 AI를 통해 살아 움직이는 영상으로 구현한 김시헌 작가의 작품 <전위의 온기>다.
내가 김시헌 작가의 AI 영상 작품을 본 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초 OCI미술관에서 열린 《털보 윤상과 뮤-즈의 추억》이란 주목할 만한 전시에서도 시헌 작가의 영상이 단연 눈길을 사로잡았던 기억이 난다. 보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할 정도였으니, 화가의 유족이 본다면 그 감회가 어땠을지. 만약 AI 영상이 전시장 끝에 있었다면 작품의 파도에 밀려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을 거다.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에는 십중팔구 작품만 있지 화가의 자리는 없다. 이 시대 작가의 AI 영상으로 전시를 연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전시의 가장 큰 장점은 익숙한 화가들의 못 보던 그림들을 상당히 많이, 다양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화가의 대표작이 주로 만년의 전성기 작품에 국한되는 일이 많다 보니, 미술관 전시에서조차 화가의 초기작, 또는 과도기 작품을 볼 기회는 극히 드물다. 개인전이나 회고전이 아니면 특정 화가의 작품을 여러 점 만나기도 쉽지 않다. 대표적으로 이규상을 들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이런저런 전시에서 본 이규상의 작품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데, 이번 전시에 출품된 이규상의 작품만 7점이다. 이규상의 추상 회화는 지금 봐도 전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조형적 밀도가 상당하다. 이번 전시에도 수준 높은 작품들이 눈을 즐겁게 해줬다.
절친한 화가들끼리는 소재를 공유하기도 한다. 같은 시대를 산 화가들의 관심사가 때론 겹치기도 한다. 실제로 전시장을 돌다 보면 같은 제목으로 그린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여럿 만나게 된다. 전시를 즐겁고도 유의미하게 감상하는 방법은 차고 넘친다. 이번 전시에서 나는 같은 제목이 붙은 다른 화가의 다른 그림을 비교해 가며 보는 재미를 누렸다. 화가들도 서로 네 그림, 내 그림 하면서 서로 품평을 주고받지 않았을까 상상하면서. 때론 같은 화가가 같은 제목으로 그린 그림이라도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른 그림이 되기도 한다. ‘그림 대 그림’이다.
전시를 감상하면서 얻은 또 하나의 수확은 서울 풍경을 담은 여러 화가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문신의 1958년 작 <서대문에서>는 도판으로만 보던 것이었고, 그와 짝을 이루는 <도시 풍경>(1958)은 이번 전시에서 처음 봤다. 문신의 다른 작품 <황혼>(1954) 또한 제작 시기로 보건대 서울의 어느 달동네 풍경을 그린 게 아닌가 싶다. 문신의 초창기 그림을 보고 있으면 조각가의 길을 가는 대신 그림을 더 밀고 나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규의 목판 작품 <북한산>(1969) 또한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접했다. 박고석은 1950년의 서울 풍경을 담은 드로잉을 남겼는데, 종이에 목탄 하나로 쓱쓱 그어 내린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박고석은 만년의 선 굵은 산 작업으로 ‘산의 화가’라 불렸고, 거의 모든 전시에서 산 그림만 소개됐지만,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면 박고석이라는 화가가 얼마나 다채로운 작업을 거쳐 만년의 산에 이르게 됐는지 알 수 있다. 또 하나, 이 전시를 통해 이건희컬렉션의 위력을 재차 실감했다. 박고석의 뛰어난 필력을 보여주는 아래 그림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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