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미술의 한계를 짚은 서경식의 쓴소리

석기자미술관(264) 서경식 『고뇌의 원근법』(돌베개, 2009)

by 김석
9788971993385.jpg


서경식의 책 『고뇌의 원근법』을 읽었다.


2009년 초판 1쇄가 나온 이래 2024년까지 7쇄를 찍었다. 그만큼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는 뜻이리라. 지난해 3월 『나의 일본미술 순례 1』(연립서가, 2022)를 통해 서경식의 미술책을 처음 접한 이래 『나의 조선미술 순례』(반비, 2014),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1992), 『나의 일본미술 순례 2』(연립서가, 2025), 『청춘의 사신』(창비, 2002)을 거쳐 『고뇌의 원근법』(돌베개, 2009)까지 우리말로 번역된 서경식의 책 여섯 권을 1년 가까이 모두 섭렵했다.


70562784_1341397569358910_7045915500018139136_n.jpg 오토 딕스, <댄서 아니타 베르버의 초상>, 1925, 합판에 유채와 템페라, 120×65cm, 슈투트가르트 현대미술관


서경식은 미술 전공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건 아무 문제가 안 된다. 전문 미술 연구자들의 글에선 볼 수 없는 그만의 접근 방식이 다른 어떤 것들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어를 모국어로 쓰면서 평생 한국 국적을 지킨 경계인이었던 자신의 개인사를 미술 작품과 결부시켜 풀어낸 글들은 더할 나위 없이 진솔하다. 서경식은 여기서 더 나아가 20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근대(近代)로 지평을 넓혀 시대의 모순과 인간의 고투를 미술로 읽어내고자 했다.


Selbstbildnis-mit-Judenpass.jpg 펠릭스 누스바움, <유대인 증명서를 쥔 자화상>, 1943, 패널에 유채, 56×49cm, 펠릭스 누스바움 미술관, 오스나브뤼크


서경식의 글은 미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특히 이 책의 서문에는 한국 근대미술에 관한 중요한 지적이 담겨 있다. 요약하자면, 한국의 근대미술은 지나치게 예쁘기만 할 뿐, 처절한 현실 인식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 근대문학에는 ‘저항시’라는 빛나는 유산이 있다. 하지만 한국 근대미술에 ‘저항 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근대 화가들 대다수가 일본에 가서 일본인에게 일본 미술을 배워왔다. 일본 근대미술에도 ‘저항 미술’은 없다.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서문을 읽어보자.


내가 이 책에 실은 글들은 한국의 독자들이 읽어주길 바랐던 이유는,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한국에서 본 미술-그것도 근대미술-에 나타나는 미의식에 대한 위화감 때문이다.


왜 내가 본 모든 작품이 그렇게 예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


2년이라는 짧은 한국 체류기간 중에 내가 볼 수 있었던 작품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단편적인 견문을 바탕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문제 제기 차원에서 굳이 말한다면 한국의 근대미술은 ‘지나치게 예쁘기만 하다’는 것이다. ‘민중미술’의 일부는 예외라 할 수 있으나, 내가 본 한에서 민중미술운동은 현재의 한국에서는 이미 역사화되었으며, 그 맥락이 현재도 계승·발전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예쁘다’는 것은 찬사가 아니다. ‘예쁘다’는 것은 보는 이가 그다지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루하다는 것도 된다. 미술도 인간의 영위인 이상, 인간들의 삶의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되어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조선 민족이 살아온 근대는 결코 ‘예쁜’ 것이 아니었을뿐더러, 현재도 우리의 삶은 ‘예쁘지’ 않다.


미술에서 ‘위안’이나 ‘치유’를 구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비난할 필요는 없다. 확실히 그것도 미술의 가치 중 하나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미술의 가치라고 한다면 우리들이 오늘날 위대한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대다수의 작품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다. 뒤러, 그뤼네발트, 카라바조, 고야, 렘브란트, 피카소, 고흐……. 이 거장들은 ‘예쁜’ 작품을 그려서 사람들을 위로하려 하지 않았다. 진실이 아무리 추하더라도 철저하게 직시해서 그리려 했다. 그것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거기에서 ‘추’가 ‘미’로 승화하는 예술적 순간이 생긴다. 그들의 힘으로 우리는 그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공유하고 있던 통념으로서의 미의식을 과감하게 파괴하고 새로운 시대의 미의식을 개척해온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나는 한국의 근대미술에서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양 대 서양’이라는 안이한 도식으로 재단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일본의 근대미술이 그런 것처럼 한국의 근대미술도 대상을 철저하게 응시하는 힘을 결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솔직한 감상이다.

이쾌대에 관한 서경식의 지적은 더 뼈아프다.


월북예술가에 대해 무언가를 말할 만한 지식은 나에게 없다. 다만 적지 않은 이들이 높게 평가하는 이쾌대의 작품을 도판으로 봤을 때, 나는 그의 작품이 정말로 뛰어난 리얼리즘 작품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나는 거기에서 어쩔 수 없이 후지타와 같은 일본인 화가들의 ‘전쟁협력화’의 영향을 읽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이쾌대가 해방 직후에 그린 군상과 후지타의 작품, 예를 들어 <사이판 섬의 동포들, 신하로서의 절조를 다하다>를 비교해보면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3pxz1ouddn5z.png 후지타 쓰구하루, <사이판 섬의 동포들, 신하로서의 절조를 다하다>, 1945, 도쿄국립근대미술관
5LRDCQL53NBGLK4EVUNDIGHXSE.jpg 이쾌대, <군상 4>, 1948년 추정, 개인 소장



이쾌대가 일본에 유학했던 일제 시대 말기, 그는 자연스럽게 많은 ‘전쟁협력화’를 봤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그런 종류의 그림만이 전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쾌대가 그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일본이라는 왜곡된 프리즘을 통해서 근대를 섭취한 피식민인의 비극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인다. 해방 후의 이쾌대가 정치적 독립만이 아니라 미의식에서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일제 시대에 자신의 내면에까지 침투한 기법과 미의식을 극복할 더욱 강렬한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가혹할까? 그럴지 모르겠으나 정말로 뛰어난 미술가들은 목숨을 건 투쟁을 거쳐 미의 세계의 개혁자가 되었던 것이다.


표지 그림은 독일 근대 화가 펠릭스 누스바움의 <사형복을 입은 자화상>이다.


Self-Portrait_in_a_Shroud_(Group_picture),_1942 (1).jpg 펠릭스 누스바움, <사형복을 입은 자화상>, 1942, 베를린 주립미술관


#석기자미술관 #서경식 #고뇌의원근법 #돌베개 #미술책 #근대미술 #저항미술 #이쾌대 #전쟁협력화

작가의 이전글물방울보다 더 가슴 찡한 김창열의 초기작 <해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