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65) 권순철 초대전 《응시, 형상 너머》+개인전 《넋》
인상주의를 필두로 한 서양 근대미술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이후 이 땅에서 태어난 수많은 화가 지망생이 조선에 온 일본인 미술 선생들에게 그림을 배웠다. 더 나아가 그들의 제의와 주선으로 당시 세계 미술의 중심이었던 파리에서 그림을 배우고 돌아온 일본 화가들 밑에서 그림을 배우기 위해 너도나도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직접 파리로 건너갔다. 김환기, 백영수, 김흥수, 이응노, 남관, 김창열 등이 그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미술의 중심이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아가면서 화가들의 파리행은 물론 화가 지망생들의 유학 열기도 차츰 식어갔다. 1989년 마흔다섯 늦은 나이에 파리로 건너간 권순철은 파리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한국인 원로 화가로는 거의 마지막 세대라 할 수 있다. 그는 파리에 자리를 잡은 이후 작품 활동에 매진한 것뿐만 아니라 부푼 꿈을 안고 파리에 온 후배 예술가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파리 한국인 화단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내가 권순철이란 화가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그의 색다른 풍경화였다. 지난해 집중적으로 서울의 산을 그린 그림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는데, 권순철의 그림엔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 볼 수 없는 용마산이 있었다. 대학원을 마친 권순철이 출강하던 선화예고에서 보이는 산이 바로 용마산이었다. 권순철은 1977년부터 여러 차례 용마산을 화폭에 담았는데, 거친 붓질로 물감을 겹겹이 쌓아 자기만의 뚜렷한 개성을 보여줬다.
권순철이라는 화가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주로 커다란 화폭에 거친 필치로 그린 <얼굴> 연작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권순철은 화가로 첫 발을 디딘 이후 여든이 넘은 오늘까지 60년 동안 변함없이 인물과 산을 주요 소재로 작업해 왔다. 나는 풍경화로 권순철이란 화가를 알게 됐지만, 그동안 직접 그림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새해를 맞아 권순철의 전시가 서울 평창동에 이웃한 가나아트센터와 김종영미술관 두 곳에서 동시에 열린다.
먼저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는 권순철 초대전 《응시, 형상 너머》(2026.2.6.~3.29). 권순철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얼굴> 연작에서 출발해, 문제의식을 인간 존재의 본질 탐구로 확장한 <넋(L’âme)> 연작까지 권순철의 회화 전반을 아우르는 다양한 작품을 소개한다. 전시장에 걸린 그림 가운데 시기가 이른 건 1974년에 그린 <자화상>, 1976년 작 <돈암동 뒷산>, 그리고 1979년에 완성한 <한국인의 얼굴을 찾아서> 석 점이다.
<얼굴> 연작의 뿌리로 여겨지는 <한국인의 얼굴을 찾아서>에는 사람의 얼굴이라고 할 만한 구체적인 형체가 없다. 대신 소의 얼굴처럼 보이는 형상이 어슴푸레하게 드러난다. 물론 그 또한 분명하지는 않다. 오로지 거침없이 화면 위에 휘갈기고, 짓이겨 바른 붓질의 흔적, 가장 순수하다고 할 수 있는 ‘그리는 행위’만이 응어리져 남았다. 권순철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사람의 얼굴과 등, 몸으로부터 눈에 안 보이는 넋으로 자기 예술을 끌고 갔다.
2전시실 한쪽 벽은 권순철의 드로잉으로 빼곡하게 채워졌다. 스케치북에서 방금 뜯어다가 붙인 듯한 날것의 그림들은 화가가 나날의 일상에서 대상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 가장 처음 느낀 풋풋한 감정을 보여준다. 주로 노인들의 얼굴을 그린 그림엔 사람을 향한 그윽하고 따뜻한 시선이 담겼다. 한 점, 한 점 꼼꼼하게 뜯어보니 용마산을 그린 드로잉이 두 점이다. 화가가 2023년에 서울역에서 그린 <잠든 노숙자>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은 부산에서 교편을 잡았던 권순철의 부친과 삼촌이 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였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부산 동래에서 교편을 잡은 권순철의 부친은 6·25 전쟁 발발 즈음 느닷없이 교도소에 구금된 이후 실종됐고, 권순철의 삼촌도 같은 이유로 실종됐다. 이후 권순철의 가족은 연좌제로 인해 오랫동안 죄인처럼 숨죽여 살아야 했다고 한다. 이 한 많은 가족사가 훗날 권순철의 작업에 결정적인 동기로 작용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권순철이 자신의 그림 연작에 ‘넋’이라 이름 붙인 이유가 이렇게 설명된다.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권순철의 개인전 《넋(L’âme)》(2026.2.12.~3.8)에선 한층 더 깊어진 권순철의 작업 세계를 보여주는 신작과 더불어 앞에서 본 <얼굴> 연작, <넋> 연작, <풍경> 연작을 포함한 회화 30여 점을 선보인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건 인왕산 그림 두 점이다. 그동안 다른 화가들의 인왕산 그림을 수도 없이 봐왔는데, 권순철이 2021년에 그린 인왕산은 과거 용마산 그림만큼의 강렬한 개성을 드러내진 않는다.
다만, 가나아트센터 전시장에서 단연 눈길이 간 그림이 하나 있다. 안쪽 전시장 한쪽 벽에 걸린 <연탄+X-mas>(2021)라는 작품이다. 타고 남은 연탄재 한가운데서 작은 촛불 3개가 가만히 타며 온기를 뿜어낸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 생존을 걸어야 하는 이들에게 크리스마스 따위는 사치일 수밖에 없을 터. 권순철은 그렇게 늙고 지쳐 더는 살아갈 힘이 없는 존재들에게 기꺼이 작지만, 소중한 촛불을 선물한다. 이 그림 또한 ‘넋’ 연작의 연장으로 봐야 하리라.
미술관과 갤러리가 지척에 있으니, 두 전시를 한꺼번에 보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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