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예술은 계속된다' 사비나미술관 30주년에 부쳐

석기자미술관(266) 《1만 일의 시간: 미술이 묻고 사비나가 답하다》

by 김석

내가 사비나미술관 전시를 처음 취재한 건 2011년 10월이었다. 독창적인 입체 회화로 이름을 알린 광주 출신 손봉채 작가의 개인전 《입체 회화에 담긴 이산의 꿈》(2011.9.21.~10.23)을 취재해서 KBS 뉴스광장에 소개했다. 사비나미술관이 안국동에 있던 시절이다. 그 뒤로 몇 번 더 미술관을 찾은 기억이 있지만, 전시를 취재해서 방송한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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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피어나는 ‘입체회화’ (KBS 뉴스광장 2011.10.10.)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2369386


사비나미술관이 은평뉴타운 개발과 함께 진관동에 근사한 단독 건물을 지어 옮긴 게 2018년 10월이다. 사비나미술관과의 본격적인 인연은 그 뒤부터였다. 2021년 여름,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작가의 개인전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다》(2021.6.16.~8.31)를 시작으로 2022년 안창홍 개인전 《유령패션》(2022.2.23.~5.29), 고상우 개인전 《Forever Free: 그러므로 나는 동물이다》(2022.6.15.~9.11), 헝가리 작가 플로라 보르시 개인전 《ANIMEYED》(2022.11.30.~2023.2.26.), 그리고 강홍구 개인전 《무인도와 유인도 – 신안바다Ⅱ》(2023.3.7.~4.23)까지 참 부지런히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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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문화] DNA로 그려낸 ‘디지털 산수화’…팬데믹을 성찰하다 (KBS 뉴스9 2021.6.26.)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219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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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차림은 화려하지만…허깨비를 좇는 시대의 초상 (KBS 뉴스7 2022.2.23.)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402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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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문화] 멸종위기 동물들의 초상…‘공존’을 꿈꾸다 (KBS 뉴스9 2022.6.18.)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489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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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문화] 인간과 동물의 ‘눈맞춤’…세계가 반한 ‘사진 자화상’ (KBS 뉴스9 2022.12.3.)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615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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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문화] 그 섬에는 ( )가 있다…‘고향 상실’의 시대에 건네는 선물 (KBS 뉴스9 2023.4.1.)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640749


잠시 취재 현장을 떠난 이후에도 꼭 봐야 할 전시는 꾸준히 섭렵했다. 가장 최근에 주목해서 본 전시가 이재삼 작가의 개인전 《달빛녹취록》(2025.2.19.~4.20)이었다. 그 뒤로 1년, 다시 미술관에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사비나미술관이 올해로 탄생 30주년을 맞아 장장 10,000일에 이르는 미술관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회고전을 연다. 사비나미술관의 출발이 1996년 관훈동에 ‘갤러리 사비나’였다는 것도, ‘사비나’라는 이름이 미술관을 세운 이명옥 관장의 세례명이란 것도 이번에 알았다. 사비나미술관의 30년 역사에 관해선 아래 뉴시스 기사를 읽으면 도움이 된다.


■“버텨야 합니다”…사비나미술관 이명옥 관장의 30년 사명감[문화人터뷰] (뉴시스 2026.2.5.)

https://www.newsis.com/view/NISX20260205_0003503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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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에 활동한 미술 기자 가운데 이명옥 관장의 책을 한 번이라도 안 읽어본 이가 있을까.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번 전시에 화가들이 그린 이명옥 관장의 초상화가 무려 17점이나 걸렸다는 점이다. 한두 점이면 아주 각별한 사이에선 그럴 수 있겠다 싶은데, 이름도 쟁쟁한 화가들이 15명이나 초상화를 그려줬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 봐도 이런 일은 일찍이 없었다. 10,00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이명옥 관장이 화가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증거가 있을까.


20260222_154038.jpg 이재삼, , 캔버스에 목탄, 아크릴릭, 130.5×80.5cm
20260222_153648.jpg 이이남, <명옥-귀걸이를 한 소녀>, 2021, 철판에 유채, ⌀53.2cm
20260222_153746.jpg 박불똥, <하하~花畵 하하하~>, 2013, 피그먼트 프린트, 34.5×24.5cm
20260222_154006.jpg 안창홍, <1999년의 사비나>, 2008, 종이에 아크릴릭, 32.5×24cm
20260222_153826.jpg 이흥덕, , 2001, 캔버스에 아크릴릭, 100×80.9cm
20260222_153811.jpg 유근택, <이명옥 관장상>, 2000, 한지에 목판, 37×28.7cm
20260222_154028.jpg 박순철, <이명옥 관장상>, 2000, 종이에 수묵담채, 49.5×39.6cm
20260222_153754.jpg 정복수, <사비나>, 1997, 종이에 색연필, 21×14cm



1만 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비나미술관과 함께해 온 작가 23명의 작품이 2층과 3층 전시장을 빼곡하게 채웠다. 참여 작가는 강홍구, 권여현, 김나리, 김명숙, 김성룡, 김을, 김재홍, 박찬용, 배찬효, 안경수, 안창홍, 안지산, 양대원, 이이남, 이흥덕, 유근택, 유현미, 정복수, 한진수, 함명수, 황선태, 황인기, 홍순명이다. 이 가운데 그동안 궁금했던 이흥덕 작가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20260222_154149.jpg 이흥덕, <춘생>, 2001, 캔버스에 아크릴릭, 91×116cm



이흥덕의 작품은 특유의 묘한 매력을 품고 있다. 화창한 어느 봄날, 나무 그늘 밑에 자리를 깔고 앉아 책을 펼쳐놓고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는 그림 속 여성. 바야흐로 봄은 설렘의 계절이 아니었던가. 꽃이 피듯, 욕정도 피어난다. 저만치 나무 뒤에 몰래 숨어 훔쳐보는 세 남자의 시선이 싫지 않은 우리의 주인공은 더없이 새침한 표정으로 앞섶을 살짝 열어 보여준다. 그런데 세 남자의 표정이 음흉한 게 아니라 유혹하듯 흘기는 우리 주인공의 표정이 더 예술이다. 성과 속을 교묘하게 버무려 놓은 그림이다. 기회가 되면 <지하철 연작>을 비롯한 이흥덕의 주요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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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22_155405.jpg 안창홍, <가족사진>, 1982, 종이에 유채, 115×194.8cm
20260222_155305.jpg 안창홍, <기념사진>, 1985, 사진에 혼합매체, 180×560cm



사비나미술관과 오랜 시간 가장 긴밀하게 협업해 온 대표적인 작가는 안창홍이다. 그래서인지 출품작 가운데 안창홍의 작품이 8점으로 가장 많다. 작가가 1980년대에 발표해 상당한 반향을 부른 <가족사진>과 <기념사진> 연작 두 점을 비롯해 한평생 고집스럽게 주류 미술계와 거리를 둔 채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선보여온 안창홍의 1980, 90년대 인물화와 동물화 여러 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다. 그중에서 단연 내 눈길을 사로잡은 작품은 1992년 작 <꽃밭에서>였다.


20260222_155543.jpg 안창홍, <꽃밭에서>, 1992, 종이에 혼합매체, 129×79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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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봤던 그림을 다른 곳에서 오랜만에 다시 만나면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2024년 여름, 경기도 파주에 있는 갤러리끼에서 열린 김성룡 작가의 개인전 《오감도(烏瞰圖/五感圖), 그리오》(2024.6.15.~9.8)에서 인상 깊게 본 그림들을 다시 만났다. 그때 내 느낌은 이랬다.


20260222_154546.jpg 김성룡, <새벽>, 2023-2024, 캔버스에 아크릴릭, 198×147.6cm



거칠고 투박한, 날것의 감성을 고스란히 투영한 그림 앞에 선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 저 얼굴들은 곧 화가 자신이 투영된 존재들.

긴 방황의 여정에서 맞닥뜨린 여러 개의 자아.

설명하기 힘든 야릇한 에너지가 캔버스 위로 분출한다. 매혹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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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고 투박한, 그러나 매혹적인…

석기자미술관(79) 김성룡 개인전 <오감도(烏瞰圖/五感圖), 그리오>

https://brunch.co.kr/@kimseok7/294


3월에 서울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고 하니 뭔가 다른 걸 또 꺼내 보여줄지 기대해 본다.

사비나미술관이 걸어온 30년은 내가 미술 기자로 일한 시간은 물론 기자로 살아온 시간보다도 더 길다. 작품부터 아카이브까지 미술관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서 눈에 보이는 성과보다도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어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생각해 본다. 미술관을 한다는 건 대단히 무모한 일이다. 그 무모함에 맞서 장장 30년 동안 한국 미술의 한 축을 사비나미술관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전시 정보

제목: 《1만 일의 시간: 미술이 묻고 사비나가 답하다》

기간: 2026년 2월 6일~4월 19일

장소: 사비나미술관 (서울시 은평구 진관1로 93)

문의: 02-736-4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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