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277) 《렘브란트에서 고야까지: 톨레도 미술관 명작展》
1901년 설립된 톨레도 미술관(Toledo Museum of Art, TMA)은 미국 오하이오주를 대표하는 문화 기관이자, 시대를 아우르는 30,000점 이상의 명작을 보유한 세계적인 미술관이다. 유리 산업가 에드워드 드러먼드 리비의 후원으로 1901년 설립돼 미국 최고 수준의 공공 미술관으로 자리매김한 톨레도 미술관은 이탈리아, 네덜란드, 프랑스, 스페인, 영국, 벨기에 등 유럽 전역을 망라하는 거장들의 걸작을 소장하고 있다.
미국 톨레도 미술관이 소장한 유럽 미술 거장들의 원화 52점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전시 《렘브란트에서 고야까지: 톨레도미술관 명작展》이 3월 21일부터 7월 4일까지 더 현대 서울 ALT.1 미술관에서 열린다. 서울 여의도에 있는 더현대 서울의 전시 공간 ‘ALT.1 미술관’을 그동안 여러 차례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전시장 구성에 세심하게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해서 늘 쾌적한 환경에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좋은 전시는 좋은 작품으로 말하는 법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어떤 환경에서 감상하느냐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다만 전시 설명문의 글씨가 너무 작아서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연세 지긋하신 분들이 깨알같이 작은 글씨를 읽으려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럴 때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은 뒤에 이미지를 확대해서 읽으면 좋다. 그림을 보고 설명까지 읽으면 좋았겠지만, 도저히 그럴 엄두가 안 나서 일단 그림에 집중하고 설명문은 사진에 담아 왔다. 아래에 소개하는 주요 작품의 설명문은 전시장에 붙어 있는 원문 그대로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직전인 1784년, 국왕 루이 16세(1754~1793)는 자크 루이 다비드에게 고대 로마의 전설을 실물 크기로 그려달라고 의뢰했다. 조국 로마를 수호하기 위해 적대 왕국에 맞서 싸울 것을 아버지 앞에서 맹세하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이야기를 담은 이 유명한 원작은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톨레도 미술관이 소장한 이 캔버스는, 이후 1786년 고위 귀족이었던 보드뢰유 백작의 요청에 따라 다비드가 다시 제작한 판본이다.
얕은 배경을 뒤로하고 마치 조각처럼 선명하게 묘사된 인물들의 신체 표현에 주목해 보라. 고대 부조 조각에서 영감을 받은 이러한 구도는 18세기 후반 프랑스 후원자들의 신고전주의적 취향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다비드는 화풍과 주제 모두에서 고대 로마의 강인함과 명예를 차용했으나, 본래 의도와는 달리 이 강렬한 이미지는 제작 3년 후 혁명가들이 프랑스 왕실에 맞서 무기를 들도록 고취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루브르 박물관에 갔을 때 틀림없이 보았을 그림이자, 최근까지도 미술책에서 본 유명한 작품이다. 화가 자신이 직접 원작을 더 작은 캔버스에 그대로 다시 옮겨 그렸으니, 이 그림은 복제본이 아니라 명명백백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또 하나의 원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지닌 독자적인 가치는 전혀 퇴색하지 않는다. 검 세 자루를 높이 치켜든 호라티우스를 중심으로, 왼쪽에선 애국심과 전의에 불타는 세 아들이 보무도 당당한 자세로 검을 향해 손을 뻗었고, 오른쪽에선 세 남자를 전장으로 보내야 하는 여인들이 수심 가득한 모습으로 힘겹게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대고 있다.
빈틈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엄격한 구도와 치밀한 묘사가 고전주의, 또는 신고전주의 미술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루브르 박물관에선 틀림없이 쫓기듯 봤을 테니 그림의 세세한 부분을 유심히 관찰할 겨를이 없었을 터. 이렇게 다른 판본을 감상할 기회가 왔으니, 이보다 큰 행운이 또 있을까 싶다. 오른쪽 여인들을 주목해 보자. 이 부분에 대한 거의 모든 설명은 여인들이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세 여인 모두 표정에서 아무런 슬픔이 엿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수면제라도 먹은 듯 조용히, 세상모르고 편안하게 잠든 모습이다. 엄마 품속에 있는 두 아이 가운데 한 아이만이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어른들의 숭고한 의식을 바라보고 있다. 저 형형한 눈동자와 굳게 앙다문 입술을 보라. 저 아이의 얼굴이야말로 이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에 숨통을 틔워주는 강렬한 포인트가 아니겠는가.
엘 그레코로 알려진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는 크레타의 비잔틴 전통을 바탕으로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회화적 기법을 익힌 뒤 스페인 톨레도에서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했다. 그의 작품은 비정상적으로 길어진 인체 비례, 대비적 색채, 내면에서 빛이 발산되는 듯한 표정으로 특징지어지며, 영적 감수성과 형식 실험이 결합된 매너리즘의 정점으로 평가된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예수가 체포되기 직전 예루살렘 성 밖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를 묘사하며, 네 복음서의 내용을 통합하여 마태복음 26장 42절의 예수의 간구를 시각적으로 해석한 엘 그레코의 대표적인 종교화이다. 화면 오른편에는 유다와 로마 군사들이 예수를 향해 다가오고, 왼편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깊이 잠든 채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낸다. 붉은 로브와 푸른 망토를 걸친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예수의 신체는 비현실적으로 길게 늘어나 있으며, 이는 그의 내면적 갈등과 영적 고양을 강조한다. 화면 왼쪽 상단의 천사는 십자가형을 상징하는 금잔을 건네며 신의 뜻을 전달하고, 요동치는 하늘은 정신적 고뇌가 드러나는 내면의 무대처럼 표현된다. 엘 그레코는 외부 광원 대신 인물 내부에서 발산된 것처럼 보이는 영적 빛을 사용해 공간을 구성했고, 푸른색 황금색 붉은색이 뒤섞인 강렬한 색채 대비를 통해 인간의 고통과 신성의 초월을 시각적으로 병치했다.
강렬한 색채 대비와 영적 빛의 표현을 통해, 이 작품은 스페인 종교미술의 토대를 마련한 엘 그레코가 종교적 이야기를 정신적으로 내면적인 체험으로 재해석했음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보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캔버스가 살짝 기울어 있다는 점이다. 정확한 사각형이 아니라 캔버스 윗부분이 살짝 오른쪽으로 기운 평행사변형이다. 제작 시기를 대략 1590년에서 1595년으로 보고 있으니, 장장 430년이란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 없었으리라.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한다. 평면 회화를 사진에 가장 잘 담는 방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캔버스의 정중앙에 초점을 맞추고 캔버스의 윗면과 아랫면이 카메라 렌즈의 프레임과 최대한 완벽하게 평행을 이루도록 해서 찍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캔버스가 미세하게 뒤틀린 게 비로소 보인다.
마태복음 26장의 말씀은 이렇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6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9절),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2절),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4~46절)>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본다. 입을 다문 채 말없이 천사를 바라보는 눈동자에서 이제 지상을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은 인간 예수의 젊은 날이 저 표정에 생생하게 담겨 있지 않은가. 엘 그레코 이전에 예수의 얼굴을 이렇게 그린 화가가 있었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 예수의 영적 고뇌가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된 장면이다. 화가가 더없이 지극한 신앙심의 소유자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안토니 반 다이크는 플랑드르 안트베르펜 출신으로, 17세기 유럽 궁정 초상화의 형식을 확립한 대표적 화가이다. 스무 살 무렵까지 페터 파울 루벤스의 화실에서 수학하며 색채와 구도, 대형 회화의 구성 원리를 익혀 젊은 나이에 뛰어난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1621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제노바와 베네치아 등지에서 활동하며 티치아노의 영향을 흡수한 그는, 부드러운 색면과 우아한 자세, 늘씬한 비례를 특징으로 하는 독자적 초상화 양식을 확립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632년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초청을 받아 궁정화가가 되었고, 기사 작위를 받아 유럽 궁정 초상화의 전형을 완성했다.
그의 초상화는 루벤스의 장대한 역사화와 달리 과장된 동작보다 절제된 감정과 인물의 품격을 중시하며, 귀족적 이상을 세련되게 표현한다. 세로 구도와 안정된 비례, 투명한 색채와 섬세한 피부 및 의복 묘사는 귀족 사회가 추구한 이상적 자아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이 초상화 속 남성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반 다이크가 안트베르펜의 저명한 시민들과 브뤼셀의 합스부르크 궁정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그리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단순한 인물 묘사를 넘어 17세기 유럽 귀족 사회가 스스로를 어떻게 이상화했는지 보여준다. 반 다이크는 권력과 지위를 화려한 상징물로 드러내기보다, 고급 복식과 여유 있는 시선과 자세, 조명 효과를 통해 내면의 절제와 품격 있는 자의식을 표현했다.
전시장에서 사진을 찍다 보면 실내조명이나 비상구 표시등 따위가 그림 액자를 덮은 유리에 비쳐 난감할 때가 많다. 그런데 세상이 좋아져서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찍어온 사진을 컴퓨터로 옮긴 뒤 사진 프로그램의 AI 지우개 기능으로 불필요한 이물질들을 간단하게 지워버릴 수 있다. 반 다이크가 그린 초상화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얼굴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은 초록색 비상구 표시등을 도무지 피할 도리가 없어서 그냥 찍어왔다. 그런데 컴퓨터로 옮겨 놓고 큰 화면으로 보니 한쪽 뺨을 비상구 표시등이 덮고 있는 게 아닌가. 늘 하던 대로 AI 지우개로 지웠더니 주인공의 얼굴선이 조금 달라졌다. 이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모자람 없이 모든 걸 다 가진 남자일까. 초상화의 대가다운 기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뛰어난 그림이다. 당대 제일의 초상화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고, 마침내 그 결과물을 받아 펼쳤을 때 초상화의 주인공이 느꼈을 자부심과 보람이 얼마나 컸을지. 그런데 나는 이 남자의 표정에서 슬픔을 본다. 멀리서 피상적으로 봤을 때는 안 보이던 디테일을 아주 가까이에서 세심하게 관찰한다. 남자의 표정을 보라. 모든 걸 다 가진 잘 나가는 귀족의 자신만만함이 어디에 있는가. 약간은 어두워 보이는 표정. 그리고 무엇보다 두 눈에 희미하게 맺힌 눈물. 내가 잘못 본 걸까. 하지만 자꾸만 저 표정, 저 눈동자가 눈에 밟힌다. 뭔가 깊은 사연을 담고 있을 것만 같은 얼굴 아닌가. 400년 전의 저 남자는 대체 무슨 말을 건네려 하는가.
서구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은 렘브란트의 명성은 인간 내면의 심리적 깊이와 미묘한 양상을 포착하는 탁월한 통찰력에 근거한다. 작품 속 인물이 착용한 화려한 깃털 모자와 금목걸이는 17세기 당시 네덜란드의 실제 복식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이러한 연극적인 의상은 본 작품이 특정 인물의 초상화가 아니라, 익명의 모델을 활용하여 인물의 유형을 탐구한 습작임을 시사한다.
렘브란트와 그의 작업실 조수들은 감정과 심리 상태를 분석하고 질감 및 빛의 효과를 구현하는 화가의 기량을 과시하기 위해, 이국적인 복장을 한 인물 습작을 다수 제작했다. 이러한 시각적 호소력을 갖춘 작품들은 암스테르담의 상인 계층에게 활발히 판매되었다. 이는 렘브란트가 고향 레이던을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1631년, 그가 새로운 도시에서 예술적‧상업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렘브란트의 초상화는 딱 보면 안다. 아, 렘브란트 그림이구나. 이 그림이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는지, 습작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림 속 인물의 얼굴에 비친 빛을 보면 렘브란트가 왜 ‘빛의 화가’로 불렸는지 알 수 있다. 그림에 바짝 다가가 주인공의 얼굴을 본다. 그러면 습작이라는 설명이 금방 이해된다. 눈을 보면 된다. 모자를 쓴 덕분에 두 눈이 그림자 속에 잠겨 있다. 게다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눈동자 표현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다 그리지 않은 미완성의 표현처럼 보인다. 주문받은 그림이라면 여기서 끝내지 않았겠지. 동서고금의 수많은 인물화와 초상화를 봤지만,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눈을 그림자 안에 가둔 건 처음 봤다. 이 그림이 습작이라면, 그걸 탐구하려 했던 걸까.
18세기 유럽에서 ‘까막잡기(Blind man’s buff)’는 구애와 우연, 연인들의 애정 행각을 상징하는 유희였으며, 이는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라는 격언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는 관능적이고 경쾌한 필치로 담장 안 정원에서 벌어지는 한때를 그려냈으며, 화면 곳곳에 봄꽃을 배치해 젊은 날 사랑의 덧없는 속성을 시각화했다.
작품 속 공간은 깊이감이 얕고 자연 배경이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어, 광활한 자연이라기보다 연극 무대처럼 인물들을 긴밀하게 둘러싼다. 이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상징적 자연은 로맨틱한 전원 풍경을 선호했던 18세기 중반 프랑스 귀족들의 미적 취향을 반영한다. 또한 이는 질서정연하고 이성적인 대칭미보다 소박하고 낭만적인 인위성을 추구했던 당대 영국식 조경 정원의 유행과도 궤를 같이한다.
프라고나르의 그림은 순정 만화의 한 장면 같다. 이 그림의 포인트는 화면 중앙에 집중적으로 채색된 빨강이다. 화가는 이 그림에서 오로지 인물 표현에만 빨간색 물감을 썼다. 특히 손과 발을 자세히 보라. 눈부시게 흰 피부와 달리 어색해 보일 만큼 인물들의 손과 발이 죄다 빨갛다. 그리고 그 빨강의 강렬함은 두 연인의 뺨에서 절정을 이룬다. 두 사람 다 발갛게 상기된 모습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왜? 둘 다 뭔가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놀이가 끝나면 이어질 둘만의 밀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알리라.
조슈아 레이놀즈 경과 더불어 18세기 영국 회화를 대표한 화가 토머스 게인즈버러는 농촌의 일상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룬 작품을 제작했다. 빛은 인물과 동물, 나무의 실루엣을 부드럽게 감싸며 장면 전체를 따뜻한 빛 아래 통일한다. 이렇듯 게인즈버러는 세부 묘사보다 빛과 공기의 움직임에 주목해 나뭇잎의 떨림, 흙길의 질감, 인물의 동세를 느슨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극적 사건이나 서사적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자연의 질서와 평온한 일상이 담담히 전해지며, 풍경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존재를 둘러싼 정서적 환경임을 보여준다. 게인즈버러의 이러한 접근은 이후 터너와 컨스터블로 이어지며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의 중요한 기반을 형성하게 된다.
이 목가적인 풍경화의 포인트는 말을 탄 두 남녀의 몸짓과 표정이다. 모자를 벗어들고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는 남자, 그리고 바구니를 든 채 뚱한 표정으로 남자를 애써 외면하듯 고개를 돌린 여자. 이 둘의 관계가 뭔지, 남자는 여자에게 뭘 바라는지, 여자는 왜 고개를 돌렸는지, 이런저런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다. 이런 생동감 있는 표현이 이 그림을 살아 있게 만든다. 이런 디테일이 그림 보는 즐거움을 한껏 더해준다.
개인적으로는 18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 1733~1808)의 원화를 처음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위베르 로베르는 폐허가 된 유적이나 건축물을 주제로 한 풍경화로 당대에 명성을 얻었다. 이번에 전시된 위베르 로베르의 <로마 고대 유물 복원가의 작업실>도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다. 내가 로베르의 작품에 관심을 두게 된 건 평소 자주 이용하는 9호선 당산역 탑승장에 붙어 있는 지하철 광고 안내 문구의 배경으로 사용된 파리 풍경화였다. 이런 그림을 광고 이미지로 사용할 줄 아는 업체의 정체가 궁금하다. 지금까지 소개한 것 외에도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유명한 화가들의 좋은 작품이 많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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