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으로 보는 독서 풍경①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요. 이 말이 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아무리 뒤져도 정답은 안 나옵니다. 이런저런 설만 분분한데요. 중국 당나라 시대에 한유라는 유명한 문장가가 아들에게 책을 읽히려고 시를 한 수 지었답니다.
시추적우제(時秋積雨霽) 때는 가을이 되어 긴 비도 마침내 개이고
신량입교허(新凉入郊墟) 서늘한 바람이 마을에 가득하구나.
등화초가친(燈火稍可親) 이제 등불을 점점 가까이 할 수 있으니
간편가서권(簡編可舒卷) 책을 한 번 펴 보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가을에 책읽기 좋다는 내용이군요. 셋째 줄에 어디서 많이 본 구절이 나옵니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고 해서 네 글자 고사성어로 많이들 기억하실 거예요. 가을이 책 읽기 좋은 계절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독서의 계절 가을에 책이 많이 팔리느냐, 그건 또 아니랍니다. 의외로 가을은 출판계에선 전통적인 비수기로 꼽히지요. 오죽했으면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고질적인 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출판계의 마케팅 전략이 낳은 산물이라는 얘기가 나왔을까요.
위 그림은 국민화가 박수근의 <독서>라는 작품입니다. 같은 국민화가로 불리는 김환기, 이중섭에게도 없는 귀한 독서 그림이에요. 그림 속 주인공은 박수근 화백의 큰 딸 박인숙 씨라고 하는데요. 가만히 쪼그려 앉아서 작은 책을 고사리 손에 쥐고 읽는 모습이 참 따뜻하고 정겹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 옛 그림 가운데 책 읽는 모습을 그린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옛 그림 가운데 독서 하면 첫 손에 꼽을 만한 작품입니다. 뒤로 인왕산이 굽어보는 경치 좋은 집의 너른 안마당 한쪽 사랑채에서 한 선비가 단정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군요. 오른쪽 위의 인곡유거(仁谷幽居)에서 인곡은 인왕산 골짜기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뜻을 풀이하면 ‘인왕산 골짜기에 있는 아늑한 집’이에요. 실제로 지금의 서촌 입구 옥인동에 겸재 정선의 집이 있었지요. 그래서 이 그림은 겸재가 한여름에 창을 활짝 열고 책을 읽는 자신을 그린 자화상적 산수화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술사학자 유홍준 선생은 <화인열전>이란 책에서 “겸재의 여성적인 진경산수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명작”이라 했습니다.
겸재의 그림 한 점을 더 보겠습니다. 그림 속 선비는 분명 책을 읽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방안에 가득 쌓인 책 더미로 향하지요. 이 그림 역시 겸재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걸로 여겨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위에 소개한 <인곡유거도>를 클로즈업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저리도 많은 책을 곳간에 쌓아두었으니 세상 남부러울 것이 있을까요. 단정하게 차곡차곡 쌓인 책만큼이나 간결하고 평화로운 선비의 멋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조선 후기의 화가로 도화서 화원을 지낸 소당 이재관(李在寬, 1783~1837)의 그림 역시 평상에 책을 쌓아 놓고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문인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인물의 자세를 가만히 한 번 보세요. 겸재의 그림과 놀랍도록 똑같지 않나요. 부채를 쥔 오른손만 다를 뿐이지 두 인물을 포개면 하나로 딱 맞아떨어질 정도입니다. 이재관의 그림을 하나 더 볼까요. 아래 그림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아예 책 더미에 기댄 채로 낮잠에 빠졌네요. 화면 오른쪽 위에 적힌 구절은 “새소리는 위아래서 들려오고 낮잠이 곧 쏟아진다.”입니다. 책 읽다가 졸리면 베고 자는 겁니다. 책과 벗하는 은자의 삶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요.
그림 속 주인공처럼 책에 푹 파묻혀 유유자적 살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옛날 옛적에는 책이라는 것이 굉장히 귀하신 몸이었습니다. 사실 책을 읽고 싶은 욕망은 자연스레 책을 갖고 싶은 욕망을 부르지요.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는 필사(筆寫)가 당연한 시절이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번듯한 서점이 있었을 리도 만무하고요. 돈 주고도 못 사는 게 바로 책이었지요. 그래서 옛 사람들의 책 사랑은 무척이나 절절합니다. 어렵사리 구한 책은 신주단지 모시듯 했어요.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은 <한정록>이란 책에 이런 글귀를 남겼습니다.
“책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책을 잘 보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한다. 즉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을 바르게 한 뒤 책상을 깨끗이 하고 향을 피우고 책을 본다. 책장을 접지 말며, 손톱으로 글자를 상하게 하지도 말고, 책장에 침을 바르지도 마라. 또 책을 베개 삼거나 어디에 끼우지도 말라. 또한 책이 손상되면 곧 고치고, 책이 무단히 펼쳐졌거든 반드시 덮어 두라. 뒷날 내 책을 갖는 자에게 아울러 이 법을 전한다.”
이토록 소중한 책이었으니 읽는 데도 정성을 다할 수밖에요.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린 이명기(李命基, ?~?)의 그림입니다. 선비는 책을 읽고, 시동은 차를 달입니다. 오른쪽 위에 자신이 직접 글을 썼는데요. “여러 해 동안 책을 읽었더니 어린 소나무가 모두 늙은 용의 비늘처럼 되었구나.” 책 읽기로 한 시절을 족히 보내고 나니 소나무조차 나이를 먹었다는 얘기입니다. 경치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책 읽으며 유유자적하는 일보다 더 큰 호사가 또 있을까요. 아래 작품은 30살에 요절한 조선 후기의 천재 화가 고람 전기(田琦, 1825~1854)의 그림인데요. 주인공은 화폭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이지만, 우리의 시선은 초가집에서 가만히 책 읽는 사람에게 향합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그림들이 묘사하는 독서의 풍경은 보셨다시피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옛사람들의 독서 편력은 이 그림들처럼 결코 한가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로 무시무시했지요. 국문학자 정민 교수의 <책 읽는 소리>라는 책을 보면 정말 입이 딱 벌어지는 사연들을 만날 수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조선시대 독서광’으로 불리는 김득신의 독서는 세상에나, 정말 어떻게 저랬을까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들지요. 한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백이전(伯夷傳」은 1억 1만 1천 번을 읽었고, 「노자전(老子傳)」은 2만 번, 「분왕(分王)」도 2만 번을 읽었다. 「벽력금(霹靂琴)」은 2만 번, 「제책(齊策)」은 1만 6천 번, 「능허대기(凌虛臺記)」는 2만 5백 번을 읽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심지어 김득신은 읽은 횟수가 만 번이 안 넘는 책은 굳이 기록하지 않았다고까지 적고 있습니다. 정민 교수는 이 대목에서 “게다가 이것이 그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읽은 성독(聲讀)이고 보면 그저 어안이 벙벙해진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어요. 굳이 왜 저런 미련한 짓을 했을까 싶겠지만, 옛사람에게 독서는 곧 삶이었습니다. 같은 책을 소리 내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독서는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존재 이유와도 같았습니다. 그런 분들의 삶에서 독서를 빼고 나면 뭐가 남을까요. 김득신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독서를 통해 무려 쉰아홉 살에 과거에 급제한 인간 승리의 주인공으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행에 가까운 독서는 궁극적으로 땀과 노력의 가치를 되새겨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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