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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Apr 08. 2020

극사실 회화의 선구자 손응성의 그림 세계

2018년에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선보인 가나문화재단 소장품 전시회에 맞춰 《가나 아트 컬렉션 I》이란 이름의 도록이 발간됐습니다. 특히 이 도록에 실린 한국 근현대 회화는 주목할 만합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잘 알려진 화가들에게도 뜻밖의 작품이 있다는 사실에 여러 번 놀라게 되더군요. 주옥같은 작품들이 참 많았습니다만, 그 가운데서 유독 제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이 있었으니….     


손응성 <고서화>, 1959, 캔버스에 유채, 45.5×53cm, 가나문화재단 소장



책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림은 본 적이 없어요. 그림 속의 책, 책 속의 글자를 해독할 능력이 없는 저로서는 대체 어떤 책이고 어떤 내용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물론 그게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고서(古書), 다시 말해 옛 책이 정물화의 소재였던 적이 있었던가. 제가 과문한 탓일까요.      

나무 마루 위에 놓인 저 오래된 책에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깃들었을까. 곳곳에 피어오른 곰팡이 얼룩은 물론 모서리의 접히고 닳은 흔적까지 정말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습니다.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죠. 이 단정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은 정물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초상화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깊은 울림이 전해지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손응성(1916~1979)이란 화가입니다. 1916년에 강원도 평강에서 태어났고, 경성에 올라와 중동중학교에 다니다 중퇴하고 18살 되던 1934년 제1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특선으로 입선하며 화단에 발을 딛습니다. 이후 일본인 미술 교사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다이헤이요(太平洋) 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합니다.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거듭 입선하며 승승장구하죠.      


문제는 화가의 친일 전력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런 내용이 보입니다.    

 

1943년 2월 조선과 일본 화가들이 모여 만든 친일미술단체 단광회(丹光會)에 가입했다매일신보』 1943년 2월 3일 자 기사에 따르면 조선 양화단의 중진인 조선미전 참여인 야마타를 중심으로 이번에 새로 미술단체 단광회를 조직하고 오는 4월에 제1회 작품발표회를 개최키로 되었다회원은 조선에서 모두 중견작가로 활약할 뿐 아니라 내지의 화단에서도 활약하는 신진 기예자 21명이 모였다.”고 보도할 만큼 단광회는 비중 있는 작가들로 구성되었다단광회에 가담하여 조선징병제시행기념」 집단 창작에 참가했다이 작품은 조선 청년들을 전선으로 나가라고 격려하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대표적인 친일미술작품이자 화필보국(畫筆報國)’의 전형이었다.     


이런 점을 분명히 안 뒤에 작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록에 소개된 손응성의 작품은 5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책에 관한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 위의 <고서화>란 작품에 특별히 주목한 것인데, 손응성이란 화가는 의외로 우리가 창덕궁 후원이라 부르는 비원(祕苑)을 즐겨 그려 비원파(秘苑派)의 창시자로 불리기도 했다는군요. 무섭도록 꼼꼼한 관찰, 극도의 자기 절제와 몰입을 통해 완성한 그림들은 많은 이가 평가하듯 ‘결벽주의’의 산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화가의 생애와 관련해 또 하나 특기할 것은 생전에 단 한 번도 개인전을 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화가의 이력을 살펴보면 어떤 의도가 있어서 개인전을 일부러 안 한 것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못 한 것인지 의아합니다. 뭐 어쨌든 거의 모든 약력에 빠지지 않고 기록된 이 특이하다면 특이한 이력이 불러일으키는 궁금증 때문에라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화가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작품 자체로만 보면 손응성은 우리나라 극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 불러도 손색이 없습니다.     


<대접>, 1960년대, 캔버스에 유채, 38×46cm, 가나문화재단 소장


<석류>, 1964, 캔버스에 유채, 18×41cm, 가나문화재단 소장


<배>, 1967, 캔버스에 유채, 35×41cm, 가나문화재단 소장


<백자 항아리>, 1968, 캔버스에 유채, 35×41cm, 가나문화재단 소장


※ 여기에 소개한 작품 이미지는 가나문화재단과 작가의 동의 없이 무단 전재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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