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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Apr 10. 2020

색깔 속의 비밀

미셸 파스투로, 도미니크 시모네 《색의 인문학》(미술문화, 2020)

유행을 타지 않는 색. 가장 많이 사랑받는 색. 그것은 파랑입니다. 하지만 파랑이 색의 제왕으로 군림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죠. 청색이 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번영을 가져다주는 행운의 색이라 여긴 고대 이집트만이 특별한 예외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청색을 야만인들의 색으로 여겨 깎아내렸습니다. 파란 눈을 가진 여자는 탕녀로, 남자는 꼴불견으로 취급했답니다. 천덕꾸러기에 지나지 않았던 파랑은 12세기가 되어서야 오랜 불명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12세기가 되자 중세 성직자와 신학자들의 색과 빛에 관한 생각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화가들은 이때야 비로소 하늘을 파란색으로 그렸습니다. 신을 우러러보는 중세인들이 하늘을 신성한 공간으로 재인식했음이 분명합니다. 극적인 변화는 숭배의 대상으로 떠오른 성모 마리아였죠. 하늘에 계신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색으로 파랑이 선택된 겁니다. 이 기묘한 반전 덕분에 파랑은 신성함과 끈끈하게 결부됩니다.     



특정한 색이 특정한 시대에 선호되기 위해서는 색을 쉽게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했습니다. 옛사람들이 색을 얻은 재료는 대개 식물과 광물이었죠. 드물기는 하지만 곤충이나 새의 깃털 따위도 색을 만드는 유용한 재료였습니다. 재료를 구하기 쉽고, 가공하는 방법도 쉬우면 그 색은 널리 쓰였습니다. 반면, 재료를 구하기 어렵고 색을 뽑아내는 과정도 까다로우면 당연히 그 색은 비싸집니다. 특정한 색의 유행은 엄청난 경제적 파급 효과를 불렀죠. 색에 깃든 역사는 흥미롭습니다.      


색채 분야의 세계적인 전문가로 꼽히는 프랑스 학자 미셸 파스투로는 이 책에서 파랑, 빨강, 하양, 초록, 노랑, 검정 등 여섯 가지 기본색을 중심으로 색채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어떤 색도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심지어 한 가지 색 안에 전혀 상반된 이미지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예도 많죠. 예컨대 노동자 계급을 상징하는 블루칼라(blue collar)라는 표현에 보이는 파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파랑의 이미지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특히 초록은 종잡을 수 없는 색으로 평가됩니다. 자연과 숲의 색이며, 생태와 환경을 상징하는 초록에는 뜻밖에도 통제할 수 없는 야성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헐크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가 되죠. 색이 지닌 이런 양면성도 무척이나 흥미롭습니다. 또 하나 예로 들 수 있는 색이 바로 노랑입니다. 뜻밖에도 노랑은 갖은 오명을 뒤집어쓴 불행한 색의 상징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선정적’이라는 이미지입니다. 노랑의 굴욕은 황색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에서 단적으로 확인됩니다. 저는 노랑에 관한 대목을 읽다가 문득 흑백 영화 《씬시티》에 등장하는 살인마만 유독 노랑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떠올렸습니다.     


영화 《씬시티》(2005)의 한 장면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색채 이미지를 하나하나 대입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과정이 될 겁니다. 저자들은 남자 어린이는 왜 파랑에 집착하는지, 여자 어린이는 왜 분홍을 선호하는지, 특정한 색에 대한 기호는 어떻게 형성되는지 등등 색에 대한 수많은 궁금증을 푸는 이런저런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러고는 정색하고 지금까지 읽은 것은 모두 잊으라고 말하죠. 어린아이와 같은 맨눈으로 색을 경험하라는 겁니다.     



미셸 파스투로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초록이라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파랑을 좋아하죠. 그래서 한동안 파랑이 돋보이는 그림들을 꽤 많이 쫓아다녔습니다. 미셸 파스투로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긴 《파랑의 역사》라는 책도 탐독했고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파랑의 화가’라고 하면 첫손에 꼽는 이는 바로 7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입니다. 저 유명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그린 바로 그 화가입니다. 파스투로는 이렇게 단언하죠. 그 어떤 뛰어난 화가도 페르메이르처럼 청색을 섬세하게 다루지는 못했다고.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1665, 캔버스에 유채, 44.5×39cm, 네덜란드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소장



물론 이 책은 서양사에 한정된 시각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시각 문화는 어떨까 궁금해졌습니다. 이것저것 자료를 뒤져봤죠. 그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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