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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Apr 10. 2020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서 만난 파랑의 매혹

조선시대에도 ‘청색의 화가’라 불릴 만한 이가 있었을까요.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청색을 유달리 잘 구사한 화가는 없었을까요. 저도 그게 궁금해서 옛 그림에 관한 숱한 자료를 뒤적거려 봤습니다. 하지만 과문한 탓에 우리 옛 그림의 색채만을 따로 떼어서 연구한 책은 아직 못 만났습니다. 특히 파랑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국보로 지정된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 중에서 주유청강(舟遊淸江)


    

그럼에도 우리 옛 그림 가운데 기억할 만한 파랑을 구사한 화가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을 들고 싶습니다. 재작년이었던가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특별전 <바람을 그리다: 신윤복 정선>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간송미술관에서 몇 차례 본 적 있는 신윤복이 그림이 그날은 전혀 다르게 보였거든요. 그림이라는 것이 볼 때마다 다른 감동을 주곤 한다는데, 그때는 유독 혜원 풍속화에서 ‘색’이 자꾸만 눈에 밟히는 겁니다.     


저 시대에 저토록 색을 모던하게(!) 사용할 줄 알았다니. 넋을 놓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혜원의 풍속화에는 파란색이 의외로 참 많이 쓰였습니다. 채색에 주목하지 않으면 잘 눈여겨보게 되지 않는 부분인데요. 기회가 된다면 혜원 풍속화를 색깔 위주로만 찬찬히 들여다보셨으면 합니다. 전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받으실 거예요. 신윤복의 여러 작품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유청강(舟遊淸江)이란 작품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이 그림의 기조를 이루는 색은 보시다시피 파랑입니다. 기생들의 치마 색깔을 보세요. 같은 파랑인데도 농담을 조금씩 달리했지요. 햇볕을 가리기 위해 천막처럼 설치한 차일 가장자리에도 푸른 물을 들여놓았네요. 심지어 배경을 이루는 커다란 바위에도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감돕니다. 이 작품을 실제로 보면 어쩜 그렇게 긴 세월에도 파랑의 신선함이 도드라지는지 모릅니다.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옛사람들은 파랑 물감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조선시대 궁중 회화부터 불교 회화에 이르기까지 청색은 채색화에서 널리 쓰였습니다. 청색은 오방색의 하나로 예로부터 궁궐의 목조건물 단청에도 절대 빠질 수 없는 색깔이었죠. 그렇다면 옛사람들은 형형색색 다양한 채색 물감을 대체 어떻게 만들어 썼을까요. 궁금증을 품고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던 차에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가 쓴 《책벌레와 메모광》이란 흥미진진한 책에서 이런 대목을 만났습니다.     


이덕무의 <앙엽기>는 주로 역사에 관한 내용이 많다하지만 화가가 사용하는 그림물감의 각종 빛깔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에 대해 적은 기록도 보인다. <철경록(輟耕錄)>이란 책을 읽다가 여러 빛깔의 물감 제조 방법에 관한 내용에 흥미를 느껴 메모장을 만들어두었다그 뒤에 <개자원화보(芥子園畫譜)>에서 비슷하지만 설명이 훨씬 구체적인 대목을 하나 더 찾았다그래서 이 두 메모를 합쳐서 한 항목으로 정리한 것이다두 자료가 한데 묶이고 보니동양화의 물감 제조법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아주 요긴하고 귀한 자료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로 조선시대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독서광으로도 굉장히 유명한 분이지요. 위 인용문에 소개된 <앙엽기>는 이덕무가 펴낸 기념비적인 백과사전 《청장관전서》에 수록된 글입니다. 총 8장으로 이뤄져 있는데 온갖 시시콜콜하고 자질구레한 지식을 모아 놓은 일종의 잡학사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여기에 그림물감 제조법에 관한 글도 있습니다. ‘화가(畫家)에게 소용되는 그림물감(畫家顔色)’이란 제목으로 <앙엽기> 제7장에 스물한 번째로 실려 있지요.     


위 인용문에서 이덕무가 읽었다는 <철경록>은 중국 원나라 말기의 저술가인 도종의(陶宗儀)라는 분이 펴낸 수필집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원나라의 법률 제도 및 서화문예(書畵文藝)의 고정(考訂) 따위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많아 원나라 때의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라고 돼 있습니다. 1366년에 완성했고, 모두 30권인데요. 이덕무가 이 책에서 물감 제조법에 관한 대목을 읽고 적어두었다가 자신의 책에 수록한 겁니다.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정도로 정말 별의별 색깔이 다 있더군요. 그중에서 청색과 관련한 대목만 추려 보겠습니다.   

  

남청색(藍靑色)은 삼청(三靑)에다 고삼록(高三綠)을 넣어 조제하고,     


아청색(鵝靑色)은 소청(蘇靑)에다 나청(螺靑)을 곁들여 조제하고,     


대저 물감을 조제 사용하는 데 섬세한 색상으로는 두청(頭靑이청(二靑삼청(三靑심중청(心 中靑천중청(淺中靑나청(螺靑소청(蘇靑)     


채색 물감을 만드는 데 ‘조제’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실 그 옛날의 그림물감 재료는 상당 부분 약재(藥材)였습니다. 그래서 물감을 만드는 것이 병을 낫게 하는 약을 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지요. 그러니 정성도 정성이었겠지만 가격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위에 열거된 용어들을 전부 다 이해하는 건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절대 무리입니다. 다만 청색을 만드는 데 널리는 쓰인 석청(石靑)이라는 재료만 설명해 보겠습니다.     


(좌) 남동석 (우) 석청



조선시대에 청색을 만드는 데 널리 쓰인 재료는 구리 산화물의 일종인 남동석(Azurite)입니다. 대부분 중국에서 수입해왔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세종실록>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을 보면 국내에서도 삼청의 재료인 토삼청(土三靑)을 캤다는 기록이 더러 남아 있기도 합니다. 이 남동석을 가루로 만든 것이 바로 석청이라는 물감 재료입니다. 옛사람들은 이걸 적절히 가공해서 다양한 청색을 만들어 썼습니다.     


이덕무의 <앙엽기>를 보면 바로 그 물감 제조법을 <개자원화보>(‘개자원화전’이라고도 합니다.)란 책에서 읽고 옮겨 놓았습니다. <개자원화보>는 청나라 화가 왕개(王槪)가 지은 회화 입문서인데요. 그림을 배우는 데 꼭 필요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당시 청나라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미술책이었습니다. 이 책에 그림물감의 재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석청(石靑)은 이른바 매화편(梅花片)과 같은 일종(一種)만이 여기에 소용되는데그 모양이 조각()으로 되어 매화편과 비슷하므로 이른 말이다석청을 조제할 적에는 사기그릇에 담고 맑은 물을 조금 부어 휘저은 다음 채취하는 데 맨 위에 자리 잡은 가루는 유자(油子)란 것으로 의복에 들이는 물감으로 쓰이고중간에 자리 잡은 것은 가장 좋은 석청으로 정면(正面)으로 된 청록색(靑綠色)의 산수(山水)를 그리는 물감으로 쓰이고맨 밑에 자리 잡은 것은 협엽(夾葉)을 상감(象嵌)하거나 견첩(絹帖)의 후면(後面)에 바르는 데 쓰이는데이것을 두청(頭靑이청(二靑삼청(三靑)이라 한다.     


물을 부어서 잘 저은 다음 높이에 따라 상중하로 나눠 재료를 채취해서 각각의 용도에 따라 사용한다는 겁니다. 맨 밑에 가라앉은 것을 채색 물감 재료로 썼다는 거지요. 기록에 따르면 조선시대 가장 널리 쓰인 청색 물감 재료는 위에 보이는 삼청(三靑)과 청화(靑花)였다고 합니다. 조선 최고의 화가 김홍도와 신윤복을 나란히 등장시켜 엄청난 화제를 모은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에도 물감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오는데요. 그 가운데 한 대목을 옮겨봅니다.     


“(도화서화원들이 색을 쓰지 못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그것은 색을 내는 안료를 구하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가령 쪽과 함께 푸른색을 내는 석청(石淸)은 중국에서도 멀리 서역 너머에서 들여왔다황색을 내는 등황은 안남(베트남)에서 배를 타고 더 들어가는 섬나라의 나무에서 채취해야 했다구하기도 힘들지만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가격도 천정부지였다돈 많은 양반의 초상화나 어진을 그릴 때는 그나마 구하기 쉬운 황색 계통의 안료가 쓰일 따름이었다.”     


그만큼 채색 물감은 참으로 구하기 힘든 귀한 재료였던 겁니다. 게다가 병을 고치는 약재를 제조하듯 만드는 데도 갖은 정성을 들였으니 말이에요. 그렇게 어렵사리 구한 재료로 곱게 색을 입혔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옛 그림을 더 깊이 음미하고 사랑할 수밖에요. 다시 혜원 신윤복으로 그림으로 돌아가 봅니다. 혜원은 ‘파랑’을 즐겨 쓴 화가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말입니다. 지금 보아도 저 색채 감각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국보로 지정된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 중에서 청루소일(靑樓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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