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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Apr 12. 2020

이순신의 전투 장면을 담은 그림②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등을 잡아 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0월 16일 신미 첫 번째 기사          


이순신의 첫 백의종군 사실을 일러주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입니다. 때는 1587년. 국토의 최북단 국경지대에 있는 녹둔도(鹿屯島)라는 섬의 수비대장이었던 이순신은 녹둔도에 침입한 여진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녹둔도 전투를 패배로 못 박지 않았죠. 그래서 곤장 몇 대 치고 관직을 박탈한 뒤 백의종군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함경도 지역 군대 총사령관은 조정에 뭐라고 보고했을까.     


북병사(北兵使)가 치계하였다. “적호(賊胡)가 녹둔도의 목책(木柵)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慶興府使이경록(李慶祿)과 조산 만호(造山萬戶이순신(李舜臣)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戰士)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 6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囚禁)하였습니다.” -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0월 10일 을축 두 번째 기사     


‘군기를 그르쳐’ 패전을 초래하고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순신에게 엄벌을 내려야 한다는 보고 내용입니다. 임금에게 이 보고를 올린 당시 북병사(北兵使)는 이일(李鎰, 1538~1601)이라는 인물입니다. 조선 중기에 활약한 군인으로 임진왜란에도 참전했죠. 녹둔도 전투는 이순신이 생애 처음 맞닥뜨린 중대한 고비였습니다. 만약 북병사의 주장을 임금이 받아들였다면, 이순신의 운명은 과연 어찌 되었을까. 당시 이순신의 나이 마흔셋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백의종군 이후는 어땠을까요. 1589년, 이순신은 특별사면을 받아 명예를 회복하고 충남 아산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비변사에서 군인을 특별 채용한다는 공고를 내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李山海, 1539~1609)를 비롯해 신료들이 추천인 명단을 제출합니다.     


비변사에게 무신(武臣)을 불차 채용(不次採用)한다고 하자이산해는 손인갑(孫仁甲성천지(成天祉이순신(李舜臣)·이명하(李明河이빈(李薲신할(申硈조경(趙儆), (중략정언신(鄭彦信)은 손인갑(孫仁甲성천지·이순신·이명하(李明河이시언(李時言한인제(韓仁濟이언함(李彦諴정담(鄭湛김당(金鐺)을 (중략추천하였다. - 선조실록 23권, 선조 22년 1월 21일 기사 첫 번째 기사     


이순신의 이름이 두 번 보입니다. 당시 영의정 이산해와 우의정 정언신이 나란히 이순신을 세 번째 추천자로 올렸습니다. 순번이 꽤 높습니다. 여기서 불차채용(不次採用)이란 조선의 특별한 인사 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차 채용은 말 그대로 차례나 서열에 상관없이 우수한 인재를 추천받아 선발하는 방식이었죠.      


이 제도는 나중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591년, 불차채용 제도를 통한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이순신은 전라도 좌수사로 임명됩니다. 당시로선 상당히 파격적인 인사였죠. 지금 생각하면 불차채용이란 제도, 유성룡의 사람 보는 눈, 임진왜란 바로 직전이란 시점이 참으로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도대체 어떻게 실추된 명예를 회복했을까. 그 이유를 보여주는 그림 한 점을 여기에 소개합니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 비단에 채색, 145.5×109.0cm, 삼성미술관 리움



그림 상단 제목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면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입니다. 장양공(壯襄公)은 앞서 소개해 드린 북병사 이일의 시호(諡號)입니다. 정토(征討)는 정벌(征伐), 토벌(討伐)과 같은 말이고요. 시전부호(時錢部胡)는 시전 부락 오랑캐라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장양공이 시전 부락 오랑캐를 토벌하는 그림’입니다.      


북쪽 국경 지역에서 여진족이 활개를 치자 북병사 이일은 1588년 초에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 마을인 시전 부락을 공격합니다. 당시 여진족이 모여 살던 여러 부락 가운데서도 시전은 꽤 강성한 부락으로 조선에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북병사 이일은 임금의 허락을 받아 1588년 정월, 시전 부락을 포위한 채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벌입니다. 가장 강한 부락 중 한 곳을 본보기로 쳐서 여진족의 기를 납작하게 꺾어놓은 겁니다. 그림 하단 왼쪽에 그 내력을 적은 발문(跋文)이 붙어 있습니다.     


공이 무자년(선조 21, 1588) 정월에 본도의 병사를 징발하고 부방(赴防)하는 수병(戍兵)을 더하여 회령부사 변언수와 온성부사 양대수를 좌우위장으로 삼고고령진 첨사 유극량과 조방장 이천을 좌우위의 선봉장으로 삼았다. (중략시전 땅의 네 부락을 포위하여 궁려(穹廬) 3백여 곳을 태워 버리고 거의 500급을 참수하였다임금이 선전관으로 병조정랑 이대해를 파견하여 장사(將士)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수고를 위로하고 공의 아들 한 명에게 관직을 주도록 명하였다이 전투는 대개 공이 오랑캐를 무찔러 쌓은 공훈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으로 그 혁혁함이 마치 어제의 일과 같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만 제목에 보이는 장양공이라는 시호가 1745년에 내려졌기 때문에, 가장 이른 시기를 1745년으로 추정할 따름입니다. 조부의 업적을 그림으로 남기기로 한 이는 이일의 손자인 이견(李汧)이었고, 그림을 그린 이는 당대에 활동한 전문 화가였습니다. 기록을 보면 여러 점을 그리게 해 종손을 비롯한 후손들이 나눠 귀하게 보관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이 도대체 이순신과 어떤 관계란 말인가. 그림 하단에 좌목(座目)이라 해서 깨알 같은 글씨로 전투에 참여한 장수들의 명단을 적어 놓았습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찾고 있던 바로 그 이름 석 자가 보입니다.     


右火烈將 及第 李舜臣

우화열장 급제 이순신     


북병사 이일의 여진족 토벌대는 왼쪽의 좌위(左衛)와 오른쪽의 우위(右衛)로 이뤄졌습니다. 이순신은 우위에서 우화열장이란 직책으로 참전했습니다. 우화열장은 ‘우측 화기 부대의 대장’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군이 사용한 화약 무기는 개인 휴대용 화기인 승자총통(勝字銃筒)이었습니다. 여진족을 상대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그 뒤에 붙은 급제(及第)는 관직이 박탈된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순신은 전투에 참여할 당시 백의종군하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적은 겁니다.      


이 그림은 이순신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조선시대 그림 두 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蹟圖帖》이란 화첩에 실려 있는 수책거적(守柵拒敵)이란 그림입니다. 녹둔도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죠. 이순신의 무훈을 그린 그림은 이 두 점이 전부입니다. 둘 다 여진족을 상대로 한 전투를 묘사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전투를 묘사한 조선시대 그림은 없습니다. 녹둔도 전투를 그림으로 남겼을 정도면, 임진왜란 전투도 그려졌을 법한 데 말입니다.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어떤 그림이 꼭꼭 숨어 있는지도 모르죠.     


이 그림이 흥미로운 건 참전한 장수 가운데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이름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순신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조선의 장수, 원균(元均, 1540~1597)입니다.     



一繼援將 通政大夫 鍾城都護府使 元均 字平仲 原州人

일계원장 통정대부 종성도호부사 원균 자평중 원주인     


버젓하게 직책이 있었던 터라 제법 깁니다. 명단을 보면 일계원장(一繼援將)과 이계원장(二繼援將) 이렇게 두 직책이 보이는데, 역시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우위(右衛) 소속입니다. 선봉장부터 이름을 써놓은 걸 보면 아마도 후방의 지원부대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통정대부는 정3품 직급을 가리킵니다. 함경도 종성 지역에 있었던 행정관청인 도호부의 장관쯤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원균이란 이름 밑에는 자(字)가 평중(平仲)이고, 원주 출신이라는 것도 적혀 있습니다. 원균이 이순신과 같은 급의 장수로 참전했음을 보여줍니다.      


훗날 극명하게 엇갈린 운명과 후대의 상반된 평가를 그때의 두 사람은 짐작이나 했을까요. 참 묘한 운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북병사가 이끈 여진족 토벌은 빛나는 승전으로 기록됐습니다. 《실록》에는 여진족 토벌 작전 자체에 관한 기록은 없고, 전투가 끝난 뒤의 상황만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지난봄에 북병사(北兵使이일(李鎰)이 시전(時錢부락을 섬멸하여 3백여 급()을 참괵(斬馘)할 때마침 날씨가 몹시 추워 장병(將兵)들의 손이 터지고 살이 찢어져 그 고초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바로 잔치를 내려 위로해야 하는데 내가 까마득히 잊어 말하지 못하고 유사(有司또한 감히 품()하지 못하였다지금 5개월이 지났는데 한 잔의 술도 내리지 못하였으니너무도 온당치 못하다내 생각에는 속히 한 관원을 내려보내 잔치를 열어 그들을 위로하고 아울러 나의 뜻을 알렸으면 한다만약 관원을 보내는 것이 폐가 된다면 그곳 감사에게 명하여 잔치를 내리도록 하는 것이 어떠할지비변사에 문의하라.” 하였다회계하기를 감사의 일행에는 따라가는 사람이 매우 많아 그 폐단이 더욱 클 것이니 경관(京官)을 보내소서.” 하니아뢴 대로 하라 하고 형조 정랑 이대해(李大海)를 차송하였다. - 선조실록 22권, 선조 21년 5월 20일 임인 두 번째 기사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니 잔치를 열어 치하해주라는 내용입니다. 위에 소개한 그림의 발문은 이 기록을 근거로 작성됐겠죠. 어쨌든 중요한 건 바로 이 전투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재기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를 알고 나면 그림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는 이순신의 전공을 묘사한 희귀한 그림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런데 의아할 정도로 이 그림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가 많더군요.     


왼쪽부터 육군박물관, 경기도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현재까지 확인된 같은 제목의 그림은 석 점입니다. 가장 먼저 세상에 알려진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본은 2010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04호로 지정됐습니다. 아울러 삼성미술관 리움과 경기도박물관이 각각 한 점씩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림에 관한 기록들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이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언젠가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는 뜻깊은 자리에 이 그림들이 나란히 걸리면 어떨까 하고요.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 이 글은 아트렉처(artlecture.com)에 먼저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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