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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서로 Sep 16. 2021

그날, 아빠의 퇴근길


  초겨울의 어느 날 오후. 엄마는 부엌에서 저녁식사를 준비 중이었고 두 살배기 동생은 온 집안을 종횡무진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내 방에서 컴퓨터 게임 중이었는데, 다른 이유는 없었고 단순히 어린이 프로그램 방영 시간이 모두 끝났기 때문이었다. 한창 게임에 빠져 있던 중에 슬그머니 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아빠가 서 있었다.


  '오늘 아빠가 일찍 온다고 했던가?'


  얼마 만에 아빠가 일찍 퇴근한 날이었을까? 확실하진 않지만 아주 오랜만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늘 퇴근이 늦었고 출장도 잦았다. 때문에 아빠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귀했다. 그날 아빠의 이른 퇴근은 그동안 아빠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모두 꺼내 조잘거릴 수 있는 기회였던 거다. 그런데,


  "쉿."


  아직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 내게 아빠가 조용히 하자고 했다. 표정은 장난스러웠다. 그 표정 덕분에 나는 단박에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이건 깜짝 선물이다.'


  아빠는 여전히 검지 손가락을 입술 위에 가져다 댄 채로 두꺼운 점퍼의 지퍼를 내렸다. 점퍼 안쪽에 흰 종이봉투 하나가 숨어 있었다. 아빠가 내게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아무도 주지 말고 혼자 먹어야 해."


  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찌나 손에 꼭 쥐고 왔는지 봉투 입구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덕분에 아주 따뜻했다. 봉투 안에는 군밤이 들어 있었다.

  

  한참 나이를 먹고 난 지금이 돼서야, 그날 군밤을 사는 아빠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아빠는 회사에서 나와 차를 향해 걷다가, 혹은 차를 타고 집으로 오다가 우연히 군밤 장수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순간 가장 먼저 딸을 떠올린다. 딸에게 줄 거라고 군밤 장수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집에 오는 동안 군밤의 온기가 식을까 봐 입구를 꼭 부여잡았을 아빠. 현관문을 열기 직전 점퍼 속에 군밤을 숨겼을 아빠. 아빠는 그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잇몸이 다 보이도록 웃는 딸의 모습을 기대했을 수도 있고, 역시 아빠가 최고라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딸의 칭찬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 아들 것도 살 걸 그랬나 살짝 후회했다가, 아직 두 살 배기에게 노점 음식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합리화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다 모를 일이다. 이젠 아빠에게 물어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아빠는 그날 퇴근길, 길을 걷는 순간순간 나를 떠올릴 만큼 나를 사랑했다.


  그날 나는 아빠가 방에서 나가고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군밤을 꺼내 먹었다. 엄마와 동생에겐 진짜 하나도 나눠주지 않았다. 오롯이 아빠와 나, 둘이서만 공유하는 사건이 생기는 게 좋았다. 둘만 아는 일들이 늘어나면 그만큼 아빠와 내 사이가 더 특별해지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엄마와 동생 몰래 군밤 반 봉지를 먹어 치웠다. 나머지 반은 아빠 몫으로 남겨둔 채.


  또 한 번의 사건은 어느 늦은 밤에 일어났다. 그날은 아빠가 퇴근을 늦게 해서 나는 물론이고 엄마와 동생 모두 이미 잠들었던 날이었다. 한창 잘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날 조심히 흔드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뜨니 어둠 속에 아빠 얼굴이 보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오랜만에 본 아빠가 너무나 반가워서 '아빠!'라고 외칠 뻔했지만 아빠가 입술 위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대신 얼른 아빠를 따라 입술 위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아빠가 눈빛으로 따라오라 말했다. 조용히 일어나 아빠를 따라 부엌으로 나갔다. 아빠 손엔 검은색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오늘은 또 뭘까?'


  기대에 찬 내 앞에 비닐봉지가 놓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엄마가 깨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봉지를 풀어보니 떡볶이가 들어 있었다. 야밤에 떡볶이를, 그것도 서프라이즈로 사주는 사람이라니. 게다가 나만 먹으라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찾아오는 나만을 위한 떡볶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낭만의 극치다.


  그렇게 늦은 밤, 작은 밥상 위에 떡볶이 한 그릇을 올려놓고 아빠와 나는 쉴 새 없이 속닥거렸다. 말하는 건 주로 내 쪽이었다. 아마 대부분이 엄마에게 혼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억울할 것도 없으면서 온통 억울하다 말하는 딸을 보면서 아빠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는 말하다 잠깐잠깐 틈이 날 때마다 떡볶이를 입에 집어넣었다. 아빠를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만큼 할 얘기가 밀려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아빠는 좀처럼 떡볶이를 먹지 않았다. 그저 내가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볼 뿐이었다. 내가 이제 그만 먹고 싶다고 할 때까지 오래도록 내 옆에 앉아서.


  엄마가 되고 나니 그날 아빠가 왜 떡볶이는 먹지 않고 오래도록 내 모습만 바라봤던 건지 알겠다. 아빠의 고단했던 하루를, 고작 떡볶이를 받아먹는 것만으로 위로할 수 있었다니 다행이다. 그리고 그때의 기억들이 오늘의 나를 위로한다. 나는 군밤 한 봉지로 특별한 아이가 됐었고, 떡볶이 한 그릇으로 사랑받는 아이가 됐었다. 사소함은 때때로 위대하다. 아빠는 내게 그걸 알려줬다.


  누군가 나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사랑 받음을 확신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 매우 감사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아빠에게 고맙다. 아빠가 만든 사소한 행복들이 차곡차곡 모여서 오래도록 날 사랑받았고, 사랑받는 아이로 자라게 했다. 태어나 처음 십 년 동안 받은 사랑으로 이십 년을 더 산 셈이다.


  요즘도 종종 남편이 날 위해 간식거리를 사 올 때면 점퍼 안에서 봉투를 꺼내던 아빠가, 어둠 속에서 떡볶이를 먹었던 우리가 떠오른다. 떡볶이 먹다가 아빠 생각이 나서 우는 애가 나 말고 또 있을까? 언제야 좀 무던해질 수 있을지. 아직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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