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나의 방에는 책이 가득했다. 어머니의 전집 욕심도 한몫했지만 늘 책을 가까이 두고 읽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책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습관이 되자 자연스레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렇게 누군가 갖고 싶은 선물이 무엇인지 물으면 장난감이 아닌 책을 말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침대 맡, 식탁 위, 화장실 선반 위에도. 언제든 읽고 싶으면 읽을 수 있도록 책을 갖다 두곤 했다. 책을 읽을수록 글이 쓰고 싶어 졌고, 그러다 학교에서 여는 백일장 대회에 나가 소소하게 상을 타기도 했다. 상을 타니 신이 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더 잘, 쓰고 싶어 졌다.
조금 더 자라나서는 선생님 몰래 교과서 뒤에 소설책을 숨겨 읽고 장래희망 란에 '소설가'를 적는 아이가 되었다. 야간 자율 학습 시간엔 문제집을 푸는 대신 원고지에 필사를 했다. 서른이 좀 넘는 내 인생 중 가장 치열하게 글쓰기를 했던 때가 열아홉, 고3 시절이었다.
덕분인지 별 탈 없이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스무 살, 닮은 꿈을 가진 친구들과 한데 모여 있는 게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이 작가 알아?"라고 묻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고, 함께 서점에 가서 오랜 시간 있어도 눈치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영어니 수학이니- 관심 없는 과목을 공부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았다. 물론 교양과목을 이수해야 하긴 했지만 그 교양과목들에 나의 앞길이 달려있지 않았다.
그리고 글도 원 없이 써보게 되었다. 쓰고 싶은 글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집을 푸느니 과제로 글을 쓰는 게 나았다. 필수 전공 수업들은 대부분 좋았다. 소설을 쓰고 시를 쓰고, 희곡을 쓰기 위해 연극을 보러 갔다. 오글거렸지만 라디오 대본을 써보기도 했고 동화도 써봤다. 다 잘 쓰진 못했으나 그저 쓰는 것이 좋았다. 그런데 그것도 몇 년이 지나자 한편 허무해지기 시작했다. 욕심도 생겨났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사람이 될 수 없을까?'
그때의 우리들은, 아니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을 작가라고 불렀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사람, 누군가들이 '작가'라고 불러주는 사람.
혼자 글을 쓴다고 해서 그를 작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대학생 시절엔 매일같이 글을 쓰면서도 나 자신이 작가라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말 그대로 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엔 '어떤 글이든. 누가 보아주지 않는다 해도.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적어내는 사람이라면, 이미 작가인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누구나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길 바라는 소망과 이미 나 자신을 작가라고 여기는 믿음. 이 두 마음이 합해져 나는 나를 소개하는 글을 쓸 때면 어김없이 이렇게 적었다.
"김 작가가 되고 싶은 김 작가"입니다.
그러면서 진짜 떳떳한(?) 작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첫 노력은 취직이었다. 일단 누군가에게 작가로 불리는 것이 급선무 같았다. 그렇게 방송작가가 됐다. 출연자들과 동료들이 나를 '작가님'이라고 불러줬다. 그런데 이상했다. 드디어 원하는 대로 작가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내가 진짜 작가인지 의문이 들었다. 막내작가 때는 글 다운 글을 쓰지 못하고 수화기만 붙잡고 있느라 그런 줄 알았다. 입봉 해서 짧게는 삼 분, 길게는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 대본도 써봤다. 그래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작가라고 말하기가 낯설었다.
이제 와서 그 이유를 추측해보건대, 아마도 그건 내가 '나의 이야기'를 쓰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글을 써서 돈을 벌었고, 남들이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었지만 정작 내 얘기를 쓴 것이 아니었기에 내가 나를 작가라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브런치에서 작가가 되기로 맘먹고 서랍에만 끄적여놓던 글들을 발행해보기로 결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며칠 밤을 새우며 공들여 쓴 대본이 내 것이 아니라 방송국 것이 되는 게 배 아파서. 꽤 오랜 시간 작가랍시고 살아왔는데 정작 내 글이라고 내놓을 만한 게 없는 게 허망해서. 죽기 전에 내가 쓴 이야기로 작가라 불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말이다.
어렸을 땐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젠 글을 놓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는 나를 소개할 때, '김 작가가 되고 싶은 김 작가'가 아니라 그저 "안녕하세요. 김 작가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