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아이 셋과 함께
개학(開學)은 학교 등에서 학업을 시작하는 것을 말한다. 개학일은 날씨와 기후, 문화 등에 따라 국가마다 다르지만, 북반구에서는 8월 하순부터 9월 상순, 남반구에서는 1월 하순부터 2월 하순이 많다.
[위키피디아]
개학이 또 연기되었다. 초등학교 다니는 첫째, 유치원 다니는 둘째, 어린이집 다니는 셋째. 정말 다양한다. 이런 다양한 조합을 데리고 집에서 일도 하고 애들도 보고 집안일도 한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는 듯하다. 모든 만남에는 즐거움과 슬픔을 동반할 수 있는데 지금의 만남 역시 즐거움과 슬픔을 동반한다.
누구나 시작은 좋다. 그래 이번 기회에 아이들과 좋은 추억도 쌓고 더 친밀해지자. 이런 기회 없으면 스스로 아이들과 하루 종일 지내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라면서 스스스로에게 큰 동기부여를 한다.
나 역시 큰 동기부여로 시작했지만, 아이들과 시간을 Full Time으로 보내면 보낼수록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슬픔이 더욱 커지는 걸 보게 된다. 그것도 극심한 슬픔. 물론 극심한 슬픔 뒤에는 격렬한(?) 기쁨도 함께 온다.
아이 셋은 정말 기가 막히다. 그들의 창조성은 정말로 연구대상이다. 그리고 매일매일 새로운 사고를 치는데.. 도대체 잠깐 한눈 팔면(한눈팔 수밖에 없다. 나도 일을 해야 하니..) 어느 순간 사고가 나있다.
한 달 동안 우리 집에 있는 많은 물건들은 파손되고 없어지고 온 집안은 낙서장으로 변하고..ㅠㅠ;
그래 아이들도 오죽 답답했으면 그럴까..
결국 나는 또 폭발한다.
"야!!!!!!"
"그만~~~!!!!!!!"
문제의 핵심은 나에게 있지만, 내가 이렇게 스트레스받는 이유는 재택근무에 있다.
재택근무.
아 얼마나 환상적인 말인가?
그런데..
아이 셋과 함께 재택근무
이건 재앙이다.
아이 셋도 제대로 못 보고 일도 제대로 못한다.
뭐하나 제대로 못하니 스트레스는 쌓여가고 그 스트레스는 분노의 데드라인을 결국 넘어버린다.
그 결과는 내 목에 핏줄을 올리는 일 밖에 없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사장님들의 고함과 성질, 갑질을 내가 아이들에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더 자괴감에 빠진다.
아...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결국 에라 모르겠다 모드로 변신한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을 때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도움이 된다.
일단 이 절망과 분노의 감정과 이상하게 뒤섞여버린 나의 복잡한 감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얘들아 산책 가자!"
지금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구원의 길이다.
이는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길이고, 나에게 큰 해방의 선물을 준다.
어차피 재택근무도 집안일도 제대로 안될 것 같을 때는 방향을 조금 틀어야 한다.
다행히 우리 집 근처 산책길에 사람이 없어서 마스크도 없이 산책할 수 있다는 아주 극적인 기쁨과 희열을 느낀다.
둘째는 심판,
첫째와 셋째가 공평하게 킥보드 시합을 한다.
결과는 셋째의 승리.
이유는 첫째가 먼저 결승전을 통과했지만, 셋째는 결승전에서 멈추어 섰다.
심판인 둘째가 자기 앞에 멈추어 선 둘째에게 승리! 를 외쳐준다.
아이들의 놀이에서도 법칙은 심판이 정한다.
첫째가 억울해했지만, 막내를 더(?) 이뻐하는 아빠는 둘째와 셋째 편을 들어준다.
원래 세상이 불공정하다는 걸 이상하게 교육하는 아빠의 개똥철학이라고 해도 될까?
그래도 금방 자기들끼리 새로운 규칙을 만들고 서로 의견을 일치하면서 놀이를 만들어 간다.
규칙도 정하고 규칙이 이상하면 금방 더 좋은 규칙을 만들어 낸다.
아이들에게 규칙도 중요하지만, 규칙보다는 즐겁게 노는 행위가 더욱 중요하기에 그들은 규칙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진 않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짧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세상의 많은 규칙들에 의해서 창조성과 즐거움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더 중요하고 귀 한일이 있음에도 그러한걸 규칙과 세상사는 법칙이라는 이유로 자꾸 뒤로 미루는 일을 해오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너무 많은 규칙과 규율들을 지키려고 해서일까?
'이것도 이러한 기준에서 잘 해내야 하고, 저것 역시 이러한 기준까지는 해내야 한다.'라는 생각이 나를 오히려 압박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모든 걸 잘 해낼 수 없는 상황들은 언제나 생기고, 그러할 때는 과감하게 한 가지를 포기하는 것도 좋다. 내 몸은 하나이고 시간도 제한되고 공간도 한 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동시에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은 아주 한계가 많음을 깨닫고 거기에 적응하는 게 필요하다.
지금의 이런 상황은 내가 모든 걸 잘 해내려고 하는 완벽주의를 완전히 깨 어부 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다.
둘 모두 완벽하게 하고 싶은데 지금의 상황에서 둘 다 완벽하게 잘 해내는 건 나를 갈아 넣는 일밖에는 없다.
결국 이도 저도 안되니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면서 자멸하고 있다고 할까?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결국 한 마리도 못 잡게 되는 현상이 지금 나에게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자멸할만한 상황에서 건져주는 구원자가 있으니 바로 나의 아이들이다.
그들은 의외로 강하다. 어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걸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덕분에 나를 생각의 무덤 속에서 건지게 도와준다.
어른이 강한 것 같지만, 어른과 다른 아이들의 생각이 더 강인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개강 연기와 재택근무가 만나면,
아주 괴로울 수 있지만
그 괴로움 속에서 또 다른 삶의 이치를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잃는 것만 생각하면 슬프지만
잃어야만 얻을 수 있는 걸 생각하면 기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