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식판 안 씻었다고?
막내딸을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나오는데, 평소에는 아무 말 없던 딸이 무슨 이야기를 한다.
"아빠, 식판 안 씻었어요!"
"뭐? 식판 안 씻었다고?"
순간 머리가 멍해진다. 어제 오후를 열심히 기억을 되살려보지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리고 여태껏 이런 실수를 한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고 딸이 아닌 얘기를 할리는 없었다. 성급히 딸아이의 식판을 열어본다.
아.. 그냥 미안하다.
어떤 핑계도 될 수 없다. 저절로 생겨나는 미안함을 딸에게 전한다.
"미안해, 아빠가 어제 정신이 없었나 봐!"
그래도 왜 그랬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정말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에 오자마자, 식판부터 열심히 씻는다. 그저 미안한 마음을 스스로 달래면서 말이다. 그렇다고 일을 되돌린 순 없다. 실수는 실수이며, 그 실수는 딸아이에게 약간의 당황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게 했다.
어떤 부모도 이런 실수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모든 부모들은 이런저런 실수들을 한다. 그 실수로 인해서 아이들은 약간의 불편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큰 불편함을 감내해야 한다. 그래도 세상에서 제일 관심과 사랑을 많이 주는 부모도 이러한데, 그렇지 않은 관계에서 겪는 다양한 실수들을 생각하게 된다.
멀리 가지 않고 나의 부모님부터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상처 받지 않는 자녀는 사실상 없다. 부모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적든 크든 자녀들에게 이런저런 상처를 준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서 부모는 가슴 아파한다. 그리고 그 상처를 치료해주려다가 잘못 치료하여 더 덧나거나 상처가 더 깊어지는 경우도 있다.
내가 어릴 적에는 분명 초등학교 때도 매번 도시락을 싸갔다. 나의 경우는 고등학교 때까지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1,2교시가 끝나자마자 다 사라지는 도시락이었긴 하지만 그 도시락을 매번 싸준 부모님을 이제야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도시락에 있는 반찬들이 고급스럽지 않다는 다양한 항변들을 늘어놓던 나의 과거 모습도 생각이 난다.
어떻게 매번 도시락을 싸줬는지 지금의 나로서 생각해보면 정말 큰 헌신이 아닐 수 없다. 분명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일을 하셨던 분이셨는데, 그 와중에도 도시락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싸줬다는 건 그것 자체로도 충분히 존경스럽다. 나는 고작 도시락통 씻기는 것 이것 하나도 제대로 못해냈는데 말이다.
매일 반복적으로 하던 일에서 실수가 생겼다는 것은, 매일 반복적으로 하는 일이 흐트러지고 있다는 증거다. 집안일과 아이들을 케어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본 중의 기본기가 중요한데, 이 기본기가 흐트러지고 있는 거다. 기본적인 일도 못하면서 다른 많은 일을 벌이고 있거나, 다른 많은 생각들과 관심들로 인하여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을 유지하는 것에서 마음이 멀어져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아니면, 알츠하이머(치매)가 왔나?
그래, 왜 주부들이 자꾸 깜빡깜빡하는지 이해가 된다. 그리고 예전에 아내가 뭔가 실수를 했을 때 그걸 이해해주기보다 혼냈던 게 괜히 미안해진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복수는 아니겠지만, 일 마치고 돌아온 아내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눈빛이......
그런데 할 말은 없었다. 내 할 일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왠지 조금 심각하게 나를 바라보는 태도가 괜히 괘씸하기도 하다.
"네가 한번 집안일해봐!"
이 말도 나는 할 수 없다. 이미 나보다 오랜 경력의 집안일과 육아 베테랑이기 때문이다.
그냥 나는 조용히 고개만 숙일뿐이다. 그리고 다음엔 절대로 이런 실수는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아내에게도 약속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