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주부로 스위치 온 할 시간
워킹맘이 힘든 이유는 일이 단순히 많아서가 아니다. 사람은 2가지 일을 할 수 있지만 정체성을 수시로 바꾸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일을 하는 워킹맘이 집에 오자마자 당장 주부로 스위치 온하기란 쉽지 않다. 아직 남아 있는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자기 사업을 하는 워킹맘이라면 일이란 게 집에 온다고 해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에서는 온전히 자기가 하는 일을 잊어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집안일과 아이들 케어를 잘 해낼 수 있다. 대부분 여기서 실패한다. 일을 2개 하는 게 힘든 게 아니라 자기가 누구인지 계속 스위치 온, 오프를 잘해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
나는 워킹맘은 아니고 워킹대디다. 그런데 계속 일을 하지 않고 일을 할 때도 있고 또 전업주부일 때도 있다. 일이 주어지면 열심히 일하지만 일이 없을 때는 집안일과 아이들 케어를 열심히 한다. 최근에 조금 긴 프로젝트가 들어왔다. 그래서 3개월 정도 정말 열심히 풀타임으로 일을 했다. 다행히 아내와 장모님의 도움과 아이들의 협조 덕에 어려웠지만 그 일을 잘 끝낼 수 있었다. 코로나 덕에 약간의 혜택을 봐서 재택으로 근무를 할 수 있게 된 건 분명 나에게 있어서는 큰 혜택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일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일을 하는 동안 아내가 고생을 많이 했다. 아내도 자기 사업체가 있으므로 그 일이 바쁜데도 불구하고 일과 집안일과 아이들 케어를 거의 도맡아서 해줬다. 나는 조용히 방에 갇힌 채 열심히 컴퓨터와 함께 줌이라는 신선한 도구와 함께 일을 했다. 생각해보니 그때가 좋았다. 일이 끝나고 다음 일이 또 주어질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기약이 없다.
그럼 재빠르게 일하던 모드에서 스위치 오프하고 주부로 스위치 온을 해야 하는데 이게 여간 쉽지가 않다. 일에 익숙했던 환경에서 다시금 집안일을 전담하는 전업주부가 되려니 왠지 어렵다. 그리고 상당히 귀찮다. 한때는 열심히 요리도 하고 집안 구석구석 청소도 잘했던 것 같은데 기억 속에서 자꾸만 그냥 잊혀버리고 싶다.
그렇게 2-3일쯤 지났을까?
집안의 정리되지 않은 모습들이 점점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내 손이 닿지 않아서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들이 나를 부른다. 그런데 하기가 싫다. 정말 싫다. 그래서 그냥 유튜브만 보고 멍하니 소파에서 누워서 창밖을 바라보기를 몇 번이나 한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이렇게나 허무하고 자괴감이 이렇게 넘쳐나는지 모르겠다. 뭔가 도망치고 싶어서 다시금 나만의 일을 찾아서 해본다. 그러다가 그것 역시 지금 해야 할 일은 아님을 곧 깨닫는다. 그렇게 3일이 지나서야 하나둘씩 집안일을 해내간다.
일이 끝나고 막 풀려서 멈추었던 운동도 하고 집안일도 다시금 하나씩 해내간다. 역시 사람은 스위치를 오프하고 다시 온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그게 정체성을 약간씩 흔들리게 하는 건 더 그렇다.
일을 하는 건 힘들고 괴롭지만 또 즐거움이 있다. 거기다가 돈도 버니깐 상당히 기쁜 일임에는 분명하다. 거기에 비해서 집안일은 힘들고 괴롭긴 하지만 뭔가 퇴보하는 것 같고 하루를 낭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하지 않고 그냥 둬버리면 큰일 난다. 집안 모든 식구들에게 계속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막상 스위치를 오프하고 다시 주부로 스위치를 온하니 또 다른 소소한 즐거움이 밀려든다. 작은 일들을 하나씩 해냈을 때의 성취감, 그리고 집이 점점 빛이 나기 시작하는 그 느낌이 좋다. 그리고 뭔가 경제적 이익은 없지만 노동 자체의 기쁨에 대해서 배워 갈 수 있어서 좋다. 그리고 뭔가 헌신, 희생 같은 느낌도 들어서 삶의 보람을 느끼기도 한다.
명함으로 나를 표현하면 사람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런데 집안일이란 게 명함을 만들 수 없다. 그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누구나 해야 하고 누구나 정당하게 평가받는 게 집안일이다. 아직 여전히 초보 수준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도 프로페셔널한 주부가 되어있지 않을까?
그때까지는 스위치 온, 오프를 열심히 잘 해내야 한다.
지금은 주부로 스위치 온 할 시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