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되는걸 누가 준비할 수 있을까?
결혼을 상상했지만, 현실은 상상과는 굉장히 달랐다. 부모가 되는 걸 상상했지만 그 현실은 결혼의 현실보다 더욱더 달랐다. 그래 결국 준비할 수 없다는 걸 살아가면서 깨닫는다. 그러기에 그저 겸손히 오늘 하루도 여전히 내가 모르고 있다는 걸 겸손히 자각한다면 어제보다 조금 더 여유 있고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아이 셋을 키운 지 12년이 되었다. 시간이라는 게 굉장히 주관적이고 상황에 따라서 가변적이기에 길다고 하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금방 지나갔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때로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었으며, 또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우리 인생이 그렇듯이 그저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 가운데서 나름 고군분투하면서 삶의 의미와 작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애썼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가 해야 할 일들이 굉장히 많다. 대부분 몸으로 하는 일들이다. 그래서 꽤나 지치기도 하고 또 아이들을 다루는걸 잘 모르기에 어려움도 많다. 그리고 대부분 아이들이 어린 시기에 부모도 이제 막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이러한 시기가 주는 어려움이 사실 더 크다.
아직은 베테랑이라고 부르기에 애매한 시기에서 겪는 직업적인 어려움, 그리고 결혼생활도 초기이므로 아내나 남편과 여러 가지로 부딪히는 일들이 많다. 거기다가 아이들은 항상 새로운 일들이 발생한다. 그동안 나름 고생하면서 인생을 살았겠지만, 결혼 초기에 겪는 어려움은 그동안 겪었던 어려움을 분명 초월하는 상황이 계속 연출되는 게 사실이다.
톱니바퀴 같은 부모 자식관계
지금도 사실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그 어려웠던 시기에 나는 굉장히 희생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을 많이 했다. 직업도 가정을 위해서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고, 내가 하고 싶은걸 대부분 내려놓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위해서 내가 굉장히 헌신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게 대부분의 부모들이 생각하는 가장 큰 오해일 듯하다.
사회통념이 그리고 전통적인 가치관이 그리고 실제적으로 보이는 현상이 부모가 자식에게 굉장히 헌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뭐 사실이다. 그런데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니 그런 게 아님을 깨닫게 된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헌신한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더 크고 넓은 의미에서 아이들 덕에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고 험난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많은 동기부여들을 아이들이 나에게 줬음을 깨닫게 된다.
셋째가 막 태어났을 무렵,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 닥쳤다. 그동안 믿고 신뢰했던 사람들에게 일제히 배신당하고(내 입장에서) 온전히 홀로 서야 했던 시기였다. 그동안 믿어왔던 가치관들을 다시금 조정하고 인생을 살아왔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야 했던 시기였다. 지금도 그 시절의 트라우마가 계속 나를 괴롭히기도 한다.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는 상처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고 꽤나 큰 트라우마는 시간이 오래 지나도록 우리 인생을 지속적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진리 앞에 그저 겸손해지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삶에 큰 고통과 어려움이 닥친다. 나에게 셋째가 막 태어났던 시절이 그 시기였고 정신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그 시절 아이들이 없었다면 내가 과연 잘 견뎌냈을까? 의문이 든다.
사실 아이들이 어려서 아이들을 보느라 정신없었고, 또 아이들을 케어해야 하니 하기 싫은 일들도 해가면서 삶을 굉장히 바쁘게 살아왔던 것 같다. 그렇게 바쁘게 살다 보니 시간은 지났고 과거의 트라우마도 천천히 잊혀 갔다. 물론 완전히 잊을 순 없지만 아이들 덕에 그 시기를 살아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삶의 이유가 나에게 생겼던 것이다.
그래 아이들은 우리에게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많은 준다. 아이들과 내가 톱니바퀴처럼 엮여서 서로가 서로를 살아갈 수 있게 힘을 제공하는 것 같다. 부모가 조금 큰 톱니바퀴라면 아이들은 그 틈에 끼여있는 작은 톱니바퀴인 것이다. 그런데 큰 톱니바퀴 하나가 홀로 존재한다면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박물관에서 전시되는 죽은 톱니바퀴가 될 것이다. 아이들이라는 작은 톱니바퀴들이 나름 열심히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계속 증명하면서 돌아가고 있으니 그 덕에 큰 톱니바퀴도 돌아간다. 누가 더 중요할까?라는 질문을 꼭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인생도 비슷한 듯하다. 우리는 뭔가 크고 웅장한 것을 더 좋게 보는 경향이 있는 듯한데, 결국 크고 웅장한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작은 많은 무리들이 필요하다. 연예인이 아무리 멋있더라도 그 연예인을 추종하는 팬들이 없다면 그때부터 그 멋이란 가치를 상실해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나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
지금의 시대는 분명히 나로서 사는 것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하는 듯하다. 물론 과거엔 너무 나로서 사는 것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시대가 변하면서 어떠한 가치들이 조명을 받고 그러한 가치들이 조명을 받기 시작하면서 사회의 분위기와 경제, 사회, 정치 모든 것들이 변한다. 가치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시대별로 더 주목받고 인기가 있는 주제들이 존재하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지금은 분명히 '나'로써 사는 게 존중받는 시대다.
그런데, 정말 나로서 산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저 홀로 존재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걸 하는 것?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온전히 이루는 것?
아이들에게 희생하지 않고 내가 추구하는 어떤 직업적인 성취를 이루는 것? 혹은 내 삶의 어떤 의미를 이루는 것?
굉장히 어려운 주제다. 그리고 아이들 없이 살아본 적이 없기에 그러한 삶에 대해서 나는 말할 자격은 없다. 다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아보니, 분명히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희생적인 의미만 있는 건 아닌 듯하다. 아이들 덕에 성장했고, 아이들 덕에 삶에 더 많은 의미가 생겼으며, 아이들 덕에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겨낼 힘을 아이들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조그마하고 많은 도움을 줘야 할 것 같고 내가 희생하는 위치에 있는 듯 하지만, 인간은 비록 어릴지라도 충분히 타인들에게 큰 위로와 공감을 줄 수 있으며 특히 그 나이가 어릴수록 조금 더 맑은 정신에 더 건강한 마인드로 타인을 도울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이들은 비록 어리지만 그 정신세계와 영혼의 순수함에 있어서는 어른보다 나은 점이 꽤나 많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희생하는 부모라는 개념보다는 서로 돕고 도와주는 삶의 동반자이자 친구이며 좋은 부모, 그리고 좋은 자식관계라는 복합적인 관계로 가족을 영위하면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