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창작 합평반 4회차 후기
정말 다르게 읽히는구나
매주 나의 시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 보이는 경험을 하고 있다. 1화에도 썼지만 시를 보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시라는 문학성이 필요한 텍스트인 경우에는 더더욱. 하지만 어렵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는 피드백이 매우 소중해진다. 어디까지 수용할지 말지는 그 다음 문제.
그런데 피드백보다 더 진귀한 경험이 있다. 소설가와 시인들이 자신의 작품에 관한 시험 문제를 맞힐 수 없다란 우스갯 소리가 있다. 작품의 배경과 담고자 한 의도가 창작자의 손에 머물 때와 독자의 눈에 닿을 때 달라진다는 의미이다. 더 쉽게는 다 다르게 읽는다는 뜻.
이번 합평에 가져간 시는 이것인데, 시에 대한 감상이 모두 달랐다. 나의 의도와도 확연하게 달랐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가족 윤리의 해체를 이야기하는 사람, 도둑질이 아니라 자신의 물건을 챙기는 것 이었다는 감상, 아버지가 아니라 사실 화자였다는 해석 등. 내가 감히 구성하고 구조화할 수 없었던 감상들이 있었다. 내가 시를 쓰는 과정에서 본 세계보다 더 넓기도 하고 동시에 줌인-줌아웃의 역동성까지. 시에 평가 이전에 이러한 감상 자체에서도 큰 배움이 있었다.
김금희 소설가가 시에 대해 정의가 떠올랐다.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전혀 다른 배열을 가지고 있기에 통상적인 규율 아래의 소통이 불가능해지고 다만 언어를 구축할 뿐이라고. 말 이외의 모든 것, 이미지, 소리, 촉각, 온도, 질량감, 부피, 이동성 등을 성취해내 전달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수사학>에서 “기쁨은 영혼의 움직임이다”라고 했다. 움직일 수 있게 차이와 공간을 만드는 텍스트가 시라고 생각하고 독자는 그 공간에서 유영한다. 그러기에 모두가 다른 독법과 감상을 가지는 것이다.
독자로서 여러 시와 소설을 읽으면서 나만의 감상을 가지는 일은 익숙하다. 반대로 나의 작품이 읽히는 것은 여전히 낯설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읽힌다는 신기함과 작품으로 읽어준다는 진지함이 창작활동에 엄청난 고양감을 주고 동력이 된다. 누군가에게 계속 읽힐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단 생각이 강해진다.
< 그 봄 >
늦봄의 한낮
아버지가 물건을 훔치고 있었다
산 속 작은 동네 작은 집 남의 집
우리가 방문하기 전까지 자유로웠을 이 곳에 울음에 감정을 담은 새소리와 창문을 통과한 햇살이 뜸을 들이는 소리가 있었다
집 한가운데서 아버지는 시계방향으로 돌며 주머니를 불린다
먼 항해를 나가는 배의 노를 젓듯 아버지의 물건을 살피는 소리가 퍼지고 담배 연기가 함부로 창문에 묻는 것을 보며 이 집의 벽이 계속 계속 넓어질 순 없을까 생각하며
벽에 몸을 붙이고 서서 집안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이 집은 이상하다 다 부서져 있고 먼지가 많고 그래서 틈이 많고 시끄럽고 그 틈에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이 남긴 말들도 걸려있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똑바로 걸어
아버지에게 갔다
이 집은 이미 죽었고 그래서 머물수록 지쳐버린다
물건을 왜 가져가요? 아버지의 눈동자가 모래알처럼 샅샅이 흩어져 하나씩 떨어진다 시간이 간다 여기 아저씨가 아빠에게 빚이 있는데 도망갔어 소식이 끊겼어
시간이 앞으로 가면 모양이 만들어진다 가질 수 없는 것을 편안하게 가져도 되는 걸까 벽이 무한정 넓어지면 수감자는 자유로워지는걸까 누가 수감자인가 욕심이 있던 자리에 계속 시도하는 다짐이 들어가도 되는걸까 풀기 어려운 문제는 늘 기대를 품고 있어 멈추지 못하고 이야기를 만드는데 그래도 되는걸까
오래된 기억을 누르면 답하지 못할 질문들만 튀어나오고
주머니에 담아 집 밖으로 나왔다
걸을 때마다 먼지가 얼굴에 달라 붙고
기침이 났고 귀를 막아야 했으며
계속 생각한다
시계 속 모래알은 여전히 떨어지고 있고
수십번은 지났고 지났는데 그 봄만을
손으로 받아 살린 사람은 누굴까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봄은 계속 되고
걸을 때마다 주머니에서 소란들이 흘러나오면
나는 크고 단단한 건물 속으로 들어가
주머니를 다시 살피고
여기서부터 시작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