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향 Aug 02. 2021

내가 우산을 펼 때, 그는 우산을 접었다.

나와 그가 느끼는 비의 양은 다르다.



8월,

예고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새로운 달은 언제나 불친절하게 시작된다


아직 휴가를 못 가서 아니, 갈 예정이 없어서일까

겨우 4시간 남짓 잠을 청하고서야

올라 탄 여의도행 5호선 지하철

이어폰을 습관처럼 꽂지만 음악은 듣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 그럴 일도 없겠지만

쓸데없는 말을 걸지 않았으면 해서

방어용으로 꽂은 액세서리에 불과하다


지하철에서 내려서

생기 없는 사람들을 따라 계단을 오르고

높고 긴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맡긴다

지상 1층,

카드를 찍고 나가서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눈앞에 보이는 여의도역 5번 출구,

웰컴 투 여의도 스트리트


무겁기만 한 눈꺼풀과 질질 끌리기만 한 발걸음

각종 짐이 들어있는 내 가방보다도 무겁기만 하다


오늘부터 앞으로 나흘 간은 비가 온다고 했는데

누군가 바닥에 물 한 바가지를 대충 뿌려둔 것 마냥

바닥만 젖어있다, 사람들은 아직 안 젖었다


안 그래도 기운 없어서 우산 들 힘도 없었는데

내가 갈 때만 비가 안 내리면 되지, 잘됐다는

생각과 동시에 이마에 떨어지는 한 방울

 

그리고 코너를 돌아오는 우산을 쓴 남자

그 사람을 보자마자 나는 우산을 폈고

나를 보자마자 그 사람은 우산을 접었다


"이 정도는 맞을만하지"라는 생각에

누군가는 우산을 접고 가고

"이 정도도 맞는 건 싫지"라는 생각에

누군가는 우산을 쓰고 간다


'월요일인 오늘은 전국 대부분 지역이

대체로 흐리고 비가 내리겠습니다...

예상 강우량은 20~70mm지만, 곳에 따라 많은 곳은 100mm가 넘게 비가 오겠습니다...'

날마다 강수량(降水量)은 어느 정도인지

수치로 정확하게 표기된다

그리고 그 체감 기준 역시

사전에는 명확하게 표기돼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느끼는 비의 양은 다르다

그러니 같은 양의 비가 내려도

누군가는 우산을 접고 누군가는 우산을 펴는 것이다

사람마다 느끼는 걱정의 정도도 슬픔의 깊이도 다르다

그러니 같은 일을 겪어도

누군가는 쿨하게 넘겨버리고

누군가는 끙끙 앓는 것이다

누군가 지금 내리는 비로 인해 급히 우산을 편다면

혹시 우산이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면

고작 이 정도 양의 비가 내릴 뿐인데

좀 젖는 게 뭐 어때서,

이거 맞는다고 큰 일이라도 나냐고

다그치고 나무랄 것이 아니라


오늘만큼은 그 사람의 우산이 되어주거나

하루만큼은 그 사람에게

내 우산을 씌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가져보자

언젠가 내가 우산을 씌어준 적이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릴 언젠가

 얼마 되지도 않는 양의 비에 내가 젖고 있을 때

그래서 내가 너무너무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플 때

그 사람도 내게 우산이 되어주거나

혹은 우산을 빌려줄 것이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메운다

고작 이마 정도를 스칠 만큼 빗방울이 떨어졌다

내가 우산을 접을 때

우산을 펴는 사람이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자











작가의 이전글 돌아온 브런치, 식기 전에 드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